
1.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당부는 목회를 하거나 어떤 형식으로든 양떼를 돌보는 위치에 선 모든 신앙인에게 너무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목회서신으로 분류되는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젊은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서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사람들을 돌보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나아가서는, 교회를 맡아 목양하는 이들뿐 아니라 2세들과 후배들을 선배된 입장으로 이끌어야 하는 모든 이가 스스로 유념하고 지켜야 할 원리를 제시한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특별히 두 가지 큰 가르침을 강조했는데, 첫째가 "거짓 교훈(doctrine)을 경계하라"는 것이고, 둘째가 "죄인 된 나를 구원하신 주의 은혜와 긍휼에 늘 감사하라"는 것이다. 이 두 축은 디모데전서 1장의 핵심 요지라고 할 수 있으며, 교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붙들어야 할 근간이 된다.
먼저 바울이 "거짓 교훈을 경계하라"고 한 것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목회 혹은 목양을 맡은 사람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여러 목회자들은 교회 공동체 내부에 침투하는 왜곡된 교리와 거짓 사상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는 일이 목회에서 매우 우선적 과제라고 설파한다. 왜냐하면 교회를 무너뜨리고, 공동체 성도들을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대개 교리적인 혼란과 곡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 제국은 다신교적(多神敎的) 세계관과 함께 수많은 사상과 철학이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난무하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뒤섞인 시대 배경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올바른 교리)을 지키고 전수하는 일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이 도전은 21세기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온갖 정보가 쉬이 떠돌고, 사람들은 그것을 걸러내지 못한 채 신앙과 뒤섞어버린다. 그렇기에 교회의 리더들이나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은 더욱 신중하게 분별하고, 거짓 교훈을 정확히 가려내어 믿음의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후반부로 갈수록,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적인 주장이나 그릇된 해석, 혹은 잘못된 윤리관과 같은 것들을 직접 거론한다. 이런 거짓 교훈에 흔들리면, 결국 사람들의 영혼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당시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 다원사회에서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진리 위에 견고히 서서 거짓을 분별하는 눈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분별력은 스스로 훈련되고, 말씀을 깊이 파고들며 바른 신학과 교리를 체득함으로써 생긴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혹은 지금 이 시대의 젊은 목회자와 모든 신앙인에게 "스스로 깨어 있으라"고 강조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 공동체가 스스로 교리에 대해 공부하고, 말씀을 기초로 한 토론과 검증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장재형 목사가 말하듯, 한 교회를 맡아 목양하는 이가 한 번도 체계적으로 교리를 정리해보지 않았다면, 그 교회의 성도들은 반드시 교리적 취약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교리를 지키고 연구하는 일이 결코 낡은 사변적 공부가 아니라, 실제 삶을 지켜내는 최전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1장 후반부에서, "너희가 거짓 교훈을 경계하되, 그것을 경계하는 목적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교리를 지키고 옳은 진리를 변호하는 일이, 단순히 '내가 맞고 너희가 틀렸다'는 식의 논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진리를 지키는 이유가 오직 사랑과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그는 분명히 말한다. 즉, 거짓 교훈에 빠진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오도록 애쓰고 기도하며, 그 마음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시사한다. 목양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를 지키며 동시에 사람들을 살리고, 결국 그들을 주의 은혜와 긍휼 안으로 다시금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짓 교훈을 경계하는 데 이어, 바울은 "주의 은혜와 긍휼을 항상 감사하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 즉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긍휼을 입은 것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는 고백을 디모데 앞에 숨김없이 내어놓는다. 바울은 본래 복음을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체포하는 일에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각별한 긍휼을 베푸셔서, 가장 심각한 죄인까지도 구원하시고 새롭게 쓰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가 말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는 표현은 과장된 겸손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인식에 기반한 고백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모든 신앙인에게 큰 희망을 주는데, 아무리 인간적으로 보기에 최악의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일만 달란트나 빚을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일만 달란트가 어느 정도 큰 금액인지를 상상해보면, 그것은 노동자에게 16년치 품삯에 해당할 만큼 막대하고, 또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으로 비교적 적은 액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전혀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는,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일만 달란트처럼 엄청난 죄를 사함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조금 잘못한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무자비한 종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바울은 스스로가 바로 그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 같은 자였음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일생을 통해 "주의 은혜와 긍휼"을 전하고 감격스러워했다.
장재형 목사가 설파하는 바와 같이, 결국 "내가 얼마나 큰 죄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아는 것"이 목회(혹은 목양)자의 내면세계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깨달음이 있어야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의 부족함을 덮고, 타인과 함께 진리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겸손과 사랑이 싹트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흘려보낸 과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대신 그 과거의 수치를 숨김없이 내보임으로써, 주님의 큰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웅대하고 넓은지 증거했다. 그리고 이는 현대를 사는 신앙인들에게도 동일하다. 나의 연약함과 죄성이 드러날수록, 도리어 주님의 은혜는 더 강렬하게 빛난다. 이런 체험이 깊어질 때, 성도들이 서로를 대할 때도 보다 너그러운 마음과 용서가 흘러나온다.
또한 바울이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가르친 이 은혜와 긍휼은, 단순히 '나 잘 구원받았으니 다행이다'라는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귀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님을 전할 수밖에 없다. 마가복음 14장에 등장하는 한 청년, 즉 전통적으로 마가로 추정되는 사람이 마지막에 알몸으로 도망치는 모습(막14:51-52)은 수치스럽고 겁 많은 제자의 민낯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기록했다는 사실은, 마가가 얼마나 자신이 연약한 자이며 동시에 주님의 무궁한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인지를 떳떳이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가르침이 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순간순간 비겁하게 달아나거나,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연약한 우리조차도 한없이 사랑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으신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을 때, 우리의 목양도 진정성을 가지고 이뤄질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며 과거를 회상할 뿐 아니라, 사도행전 9장에서 자신이 어떻게 극적으로 회심했는지를 간증한다. 담마다스쿠스로 가던 중 빛 가운데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고(행9:4),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그 후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약 3년간 머물며 깊은 묵상과 기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의 신학적·영적 기초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자신과 같은 자에게 베풀어진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곱씹으며, 동시에 구약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기틀을 마련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있었기에, 훗날 바울은 "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2)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도 강조하는 바, 우리가 디모데전서 1장을 통해 꼭 붙들어야 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은혜요 긍휼이며, 이 은혜가 늘 우리 내면에서 넘쳐흘러야 한다는 점이다. 디모데는 믿음이 좋은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았던 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딤후1:5).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 디모데 또한 '은혜가 아니라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할 때, 비로소 바른 목회, 바른 사역, 바른 지도력이 나올 수 있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이런 맥락에서 마가가 자신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을 다시금 떠올리면, 그 메시지는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결국 가장 결정적 순간에 주님을 버리고 달아나버린 겁쟁이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나를도 끝까지 붙드셨다"라는 고백으로 읽힌다. 이것이 바로 마가가 증거하는 놀라운 은혜다. 디모데도 이와 유사한 내면의 성품을 지닌 이로서, 바울이 볼 때는 부드럽고 소심하며, 때로는 병약하게까지 보이는 젊은 후배였다. 그러나 바울이 너무나 잘 알았듯, 이런 연약한 그릇을 하나님은 들어 쓰시고, 도리어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시는 분이다. 바울이 말한 "나는 이 땅의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나쁜 놈이었다"(딤전1:15)는 식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아, 나 또한 그렇구나. 내가 잘나서 교회에 와 있는 게 아니구나"를 절감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매일매일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은혜에 감사할 때, 목회나 목양의 자리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을 감싸 안고 그들이 어떻게든 회복되어 가도록 동행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라고 고백한다. 바울이 '주님이 자기를 충성되이 여기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한때 교회를 붕괴시키려 했던 자를, 주님은 충성된 종으로 여기시고 막중한 '이방인의 사도'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불러 쓰시는 기준은 인간적인 이력이나 스펙, 자격 조건을 뛰어넘는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요,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여러 가르침에서 늘 강조하듯, 우리는 '내가 스스로 충성된 사람'이 되어서 직분을 맡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의롭다 칭해주시며(칭의), 거룩하다 하시는(성화) 은혜 속에서 직분을 맡게 된다. 이것이 "주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다"는 바울의 고백이 가진 실체다.
이러한 은혜의 고백이 구체적으로 목회 사역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바울이 말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개념은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의 주님 칭찬과 연동된다.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고 칭찬했고, 반대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게으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했다. 이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잘 장사하고 열매 맺어야 하는 책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주님이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감격스러워한 것은, 적은 일에서부터 충성된 태도를 가지면 하나님이 더 큰 사명을 맡기신다는 원리를 잘 보여준다. 우리도 한 공동체에서 작은 역할을 맡는 순간부터 이미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기회를 얻는 셈이다.
디모데전서 1장은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바른 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와 긍휼에 끊임없이 감사하고 △이 땅에서 직분을 맡은 자로서 충성되이, 그리고 올바른 양심과 강한 믿음으로 환란을 이겨나가라는 권면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단지 초대교회 시절의 바울과 디모데만의 얘기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성도가 마음에 새겨야 할 원리다. 장재형 목사가 자주 말하듯,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흔들리고 개개인이 흔들릴 수 있지만,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고 분별력 있게 세상을 살아가며 동시에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와 구원의 보편성
장재형 목사를 키워드로 다시 생각해보면, 디모데전서 2장으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것이 '목회하는 자(혹은 모든 성도)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기도'라는 점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어는 "첫째(First of all)"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다. 즉, 목회자든 평신도든, 교회를 섬기는 모든 이들은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하며, 그 기도는 '모든 인류'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디모데처럼 어리고 또 병약하기까지 한 목회자에게는 실로 벅찬 명령처럼 들릴 수 있다. '내가 섬기는 이 작은 교회 돌보기도 벅찬데, 어떻게 로마 제국 전체,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웅장한 세계관'을 열어 보인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분이 만유의 주재가 되시며,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바울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2)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은,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네로)와 같은 최고권력자를 염두에 둔 것이다. 교회는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때때로 혹독한 핍박을 받았지만, 바울은 '그럴수록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밝힌다. 즉, 위정자들이 하나님 앞에 바른 결정을 하도록 기도해야, 결과적으로 교회도 안정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명령은 교회가 혹 독재나 불의한 정권과 타협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세상의 결정권자들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들이 회개하여 선한 정책을 펼치도록 중보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거대한 국가 권력과 정치 체계 속에서 한 개인은 무기력해 보일 수 있으나, 교회는 그들을 향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모든 제도와 결정에 미치기를 간청해야 한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고 말한다. 이 대목은 교리사적으로 큰 논쟁을 일으킨 부분이기도 하다. 칼뱅주의(Calvinism)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예정)을 강조하며,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편협하거나 옹졸한 차원이 아님을 밝혀준다. 동시에, 로마서 9~11장에서 말하듯 '선택'의 신비도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특별히 선택된 자들의 은혜'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서로 모순되는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안에서 조화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도 여러 강연에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사랑의 열매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도, 동시에 "그 선택이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온 인류에게 열려 있는 것임을 기억하자"고 강조하곤 한다.
디모데전서 2장에 이르면,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분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시는 분도 오직 한 분,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라고 선언한다. 이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딤전2:6). 속전(Ransom)은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 대신 지불하는 값으로,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그 값을 치르셨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제한적 속죄이냐, 보편적 속죄이냐"라는 신학 논쟁의 장에서, 바울의 이 말은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이'를 향해 열려 있다"는 진술에 가깝다. 그러나 실제로 그 보편적 은혜 안에 들어올 사람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이라는 것을 사도행전, 로마서 등 여러 본문이 동시에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결코 범위를 초월한 편협한 선택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이며, 각 사람도 "때가 되면 이 사실이 증거될 것"(딤전2:6)이라고 믿는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다음과 같은 예화를 종종 언급한다. 어떤 사람이 지하철역에서 전도를 하려다가, '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일까' 혹은 '누가 착하고 선한가'를 재보느라 결국 아무에게도 말을 못 붙이고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우리의 현실과 비슷하다. 혹 어떤 이가 우리 눈에 죄가 너무 심해 보이고, 도무지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게 보이더라도,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바로 그런 사례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던 가장 악독한 사람이었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변화시키셨다. 이런 경우를 놓고 보면, 우리가 이웃을 향해 '저 사람은 안 돼'라고 속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하는 처사가 되고 만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하며, 그 기도를 네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디모데전서 2장1절에서 말하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다. 원어로 간구(δέησις, 데에시스)는 'Petition' 혹은 'Request'로 번역되는데, 이는 결핍의 상황에서 간청하는 기도를 가리킨다. 기도(προσευχή, 프로슈케)는 왕 앞에 무릎 꿇듯 존귀하신 분 앞에 나아가 엎드려 간절히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도고(ἔντευξις, 엔투시스)는 인터세션(Intercession) 혹은 중보기도, 다른 이들을 대표하거나 대신하여 드리는 공중 기도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감사(εὐχαριστία, 유카리스트)는 성찬과 직접 연결되며, 주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과 생명을 되새기며 드리는 감사 기도를 뜻한다.
이 네 가지 기도 형태는 사실 기도 생활 전반을 매우 구체적으로 분류해 주는 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늘 개인적 필요만을 구하기 쉬운데,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기도를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놓는다. 특히 중보기도와 감사기도는 공동체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라는 곳은, 내 문제만 놓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나아가 세상 속 권력자들과 통치자들까지 품고 기도하는 곳이다. 이런 장면을 구약에서는 출애굽기 17장, 아말렉과 전투하는 장면에서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고, 아론과 훌이 그의 팔을 받쳐줌으로써 전쟁에 승리하게 되는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본다. 이는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께 중보하고 간구하면, 그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장재형 목사는 기도를 설명할 때, "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구호를 자주 인용한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표현으로, 오늘날 통신과 교통이 발달해 전 세계가 '지구촌(Global Village)'이 된 시대에 더욱 적합하다. 우리는 지구 저편에 있는 이들의 아픔도 실시간으로 듣고 볼 수 있고, 또 하루면 비행기로 거의 어디든 도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전 세계를 품고, 각 지역에서 행동하라'는 이 구호가 실제적인 사명이 된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내 능력 밖의 거대한 영역'처럼 보였겠지만, 영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掌中), 즉 손바닥 안에 있고, 교회야말로 영적 통치의 권세를 함께 위임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이러한 영적 시각을 회복하여, 온 세상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이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단지 세상에 평화가 임하기만을 구하는가. 바울은 한 발 더 들어가서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기도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단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이미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대속물(속전)로 주시어 완성하신 사건에 기초한다. 이 점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2:6)라는 본문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 전도가 단순히 교세 확장이나 개인적 목표 성취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말씀이, 마치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만인구원설(Universalism)'을 지지한다고 곧장 결론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 자신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 여러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믿음의 반응'을 분명히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는 베드로후서 3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마음은 극도로 넓고 관대한 보편성도 지닌다. 교회가 이 거대한 구원의 스케일을 마음속에 품는다면, 전도 대상자를 대할 때나, 혹은 아직 복음에 적대적인 사람을 대할 때도 결코 포기하거나 섣불리 단정 짓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끝으로 디모데전서 2장7절에서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그가 자부심을 가지고 '전파하는 자와 사도' 직분을 말하는 것은,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자기 자신을 부르셔서, 도리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요 스피커로 세우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때문이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조차, 총독과 왕 앞에 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을 향해 "나뿐만 아니라 당신들도 이 복음을 듣고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행26:29)는 명언을 남겼다. 이런 담대함은 디모데전서 2장4절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목회서신인 디모데전서가 전하는 바, 곧 디모데에게 주어진 권면은 오늘날 교회를 이끌거나 섬기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이기도 하다. 디모데는 연약해 보였고, 실제로 자주 위장병에 시달렸으며(딤전5:23), 에베소라는 대도시에서의 사역은 심적 부담이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에게 "거짓 교훈에 흔들리지 말고, 그 모든 사상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라. 그리고 스스로가 받은 한량없는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특별히 임금들과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들이 바른 길로 서야 너도 경건하고 평안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니, 겁내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라"고 가르쳤다. 장재형 목사가 거듭 말하듯, 교회가 신앙 공동체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기 위함이다. 교회가 자기 내부로만 침잠하여, 세상 사람은 아예 바라보지 않고, 세상 권력자들이 어떻게 하든 그저 무관심하게 묵과한다면, 본문이 말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셈이 될 것이다.
또한 바울이 강조하는 기도의 네 가지 영역(간구, 기도, 도고, 감사)은 우리 현실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려움과 결핍이 있을 때 그 부족을 채워주시도록 간구하고, 왕이신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는 기도를 드리며, 공예배와 함께 공동체를 대표하거나 중보하는 도고에 힘쓰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마다 성찬의 감격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여러 형태의 기도가 신앙 공동체에 균형 잡혀 있을 때, 교회가 비로소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예컨대 '간구'만 강조하면 자기 필요 채우기에 급급해지고, '감사'만 지나치게 치우치면 현실의 결핍과 고통을 외면하게 되며, '중보기도'만 강조하다 보면 개인적 경건이 허술해질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이 가르쳐준 이 4가지 구분은 실제로 우리가 예배와 사역을 계획할 때 균형감 있게 기도를 실천하도록 안내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는 말씀은 초대교회가 세상에 던진 가장 혁명적인 선언 중 하나였다. 그 당시 로마 제국 안에 살아가던 수많은 철학자, 신관(神官), 종교인, 황제 숭배자들은 저마다 '신'을 말했지만, 바울은 오직 한 분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유일무이한 대속자이자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이 고백은 세상에 타협하지 않았고, 그 결과로 교회가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당돌한 믿음 때문에 교회는 로마 제국을 '영적으로' 뒤흔들 수 있었다. 결국 4세기 초에 이르러 기독교가 공인되고, 제국 전역에 복음이 퍼져나가는 큰 결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디모데전서 2장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가르침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품고 기도하는 교회의 역동적인 사명을 재발견하게 만든다. 오늘날 교회는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도전들을 받는다. 과학 기술의 발달, 다원주의의 심화, 종교의 상대화, 물질 만능주의, 문화적 혼합주의 등 다양한 양상으로 신앙의 진리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흐름이 거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 아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선택과 보편성을 동시에 붙들어야 한다. 교회가 이런 자세로 임금들과 위정자들을 위해, 또한 세상 권세를 위해 기도할 때, 비록 지금 당장은 그들이 복음에 대해 적대적일지라도, 주님은 역사를 움직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섭리의 원리이자,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 계획이 실제로 이 땅 위에 펼쳐지는 방식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기도의 실천을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주님의 시각'이란, 악해 보이는 자라도, 희망이 없어 보이는 자라도, 하나님이 돌이키시면 성도로 변화될 수 있음을 믿는 바라봄이다. 바울이 초대교회 최악의 박해자에서 최고의 전도자로 변한 것처럼, 우리의 이웃과 동료, 심지어 권력자들까지도 회복되어 복음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참된 목회, 혹은 목양의 출발점이 된다. 곧, 나 자신이 받은 한량없는 은혜를 상기하면서, 그 은혜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하고, 기도로 끝나지 않고 직접 복음을 전하며,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 때, 교회는 세상과 전혀 동떨어진 삶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빛과 소금으로, 기도와 행함으로, 말씀과 사랑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디모데전서 1장과 2장을 관통하는 신학적·목회적 맥락은 명료하다. 첫째로, 우리는 거짓 교훈을 분별하며, 교리적 기초 위에 굳게 서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 많은 본성이 그릇된 가르침에 쉽게 유혹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죄인 중 괴수"인 나조차도 구원하신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긍휼을 매일 묵상하며 감사해야 한다. 이 은혜를 깨달으면, 타인을 향한 무자비함이 아니라, 타인을 세우고 품는 목양으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별히 권세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그 기도를 통해 우리 역시 경건하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위해 부름받았고, 그러므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향유해야 할 구원 소식을 전했다.
시간이 흘러도, 디모데전서를 향한 신학적 관심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 교회가 세속화와 분열의 위기 속에서 이 서신을 다시 읽으면, 기본으로 돌아가 '진리, 은혜, 기도'라는 세 가지 기둥을 재점검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교회가 복잡한 프로그램이나 외형적 성장만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폐해를 숱하게 지적해 왔다. 그가 강조하는 핵심은 결코 새롭지 않다. 이미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전한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올바른 교리를 지키고, 주님이 주신 은혜와 긍휼을 떠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것." 프로그램보다, 방법론보다, 조직 운영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바로 이것들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디모데전서 1~2장은 한 개인의 신앙적 성숙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어떤 정신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기둥과도 같은 장이다. 실제로 디모데전서 2장 이후에도 바울은 여성 리더십, 장로와 집사의 자격, 교회 내부 질서, 경건의 비밀, 물질에 대한 태도, 장래 환란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 모든 세부 항목들의 토대가 되는 전제는 변함이 없다. 즉, 교회는 교리를 왜곡하는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진리를 지켜야 하며,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직분을 맡은 것은 전적인 은혜이므로,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사역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마음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바라본 교회 본연의 모습이며, 디모데가 일생 동안 붙들었을 삶의 지침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되새길 때, 세상 뉴스와 정치 현안, 도처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전쟁, 분열, 파벌 싸움 등의 소식을 접하며 마음이 무너질 수 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세상이 어두운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라는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으며,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기도하면, 역사와 세상이 움직인다." 이런 확신을 가진 바울은 감옥에 있어도 절망하지 않았고, 사역 중 수많은 핍박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크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크시기에, 결코 세상에 눌려 주저앉지 말고,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해, 그리고 임금들과 권세자들을 향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 역시 여러 설교와 저술을 통해, 이 사도적 확신을 21세기에 걸맞은 언어로 다시 전해주고자 한다. 그는 기도가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행동이라고 거듭 말한다. 더욱이 그 기도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반복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세상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함께 호흡하는 수준이 될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고 역설한다. 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아가며, 동시에 구원의 문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임을 강조한다.
디모데전서 1장과 2장은 우리에게 거짓 교훈을 경계해야 하는 중요한 책임과, 더불어 죄인 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늘 감사하라는 당부, 그리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해 기도해야 한다는 소명을 동시에 제시한다. 교회가 이 셋 중 어느 한 축만 강조해도 균형을 잃게 된다. 만약 교리 수호만을 외치다가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져 버리면, 교회는 차가운 지식 우상이 될 수 있다. 반면 은혜만 강조하다 보면, 성도들의 교리적 분별력이 약해져 거짓 가르침에 쉽게 휩쓸릴 수 있다. 또한 기도와 전도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면, 교회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린다. 따라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이 균형 잡힌 권면은 현대 교회가 반드시 되새겨야 할 근본 가르침이다.
나아가 목회서신의 목회적 측면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라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분투할 것을 예상했기에, 개인적으로 위로와 권면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디모데전서 1장 마지막에 "환란을 '강한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싸워 이기라"(딤전1:18-19)고 한 것과, 2장 들어서자마자 기도부터 강조하고(딤전2:1),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 것은 결국 하나의 선순환을 이룬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면 믿음이 강해지고, 그 믿음은 착한 양심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며, 착한 양심은 거짓 교훈에 넘어가지 않게 해준다. 동시에 이 모든 기반 위에서 "주의 은혜와 긍휼"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디모데를 향해 쓰였지만, 사실 그 편지는 초대교회 전체, 그리고 2000년 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 본문을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은, 이 보편적이고도 근본적인 진리가 여전히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목양자' 혹은 '목회자'다. 비록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직분을 받지 않았더라도,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이웃과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돌보고 복음으로 이끄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디모데전서 1~2장이 강조하는 원리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즉, 거짓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경계하며, 동시에 내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사랑의 선물인지를 잊지 않고, 결국에는 그 사랑으로 세상을 품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 기도가 구호로 그치지 않고 실제 삶으로 번져나갈 때, 교회는 진정한 능력을 드러내게 된다.
결국 "거짓 교훈을 경계하라"와 "주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라"는 두 기둥이 단단히 선 사람만이,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온 것처럼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령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목회(목양)의 본질이다. 장재형 목사 또한 늘 말한다. "우리는 이 땅을 지나가는 순례자이며, 결국 천국이 우리의 본향이기에, 그 소망을 간직하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섬겨야 한다." 이 소망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며, 세상의 그 어떤 물질이나 권력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이 온갖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과 담대함을 잃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소망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가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디모데전서가 장차 수많은 세대의 교회를 향해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