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깨어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이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나 현대의 교회나 늘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핵심 본문 중 하나이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과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간단히 구분하며(벧후 3:3~4), 종말론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는 곧 구원에의 희망, 그리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갖추라는 의미다. 종말에 대한 말씀은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지만, 그 핵심은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깨어 있으라'는 데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자주 인용하며, "종말론적 시각이란 결코 공포심이나 막연한 불안감의 토대가 아니라, 성도에게 각성과 책임을 부여하는 동력"이라 강조해 왔다.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를 잊고 세상의 반복되는 사이클-봄·여름·가을·겨울-에만 매달릴 때, 종말에 대한 감각은 점차 무뎌지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며 현실에 안주하고 조롱하는 자들의 말을 단호하게 배격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시간의 반복'을 뛰어넘어 '목적과 방향'을 지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 심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벧후 3:7~10).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시간과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더 회개하고 구원받길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벧후 3:9). 그러므로 종말이 지연된다고 해서 결코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거나 무효화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더 많은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팬데믹이 닥쳤던 2020년은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위기와 변화를 맞이했다. 일상은 붕괴되고 질서는 흐트러졌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두려움과 절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은 이 위기 속에서 더욱 간절히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와 은혜를 경험하기도 했다.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사 60:2)라는 말씀처럼, 장재형 목사는 어려움이 깊어질수록 빛 되신 주님을 더욱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그리하여 낙심보다는 소망, 절망보다는 믿음을 붙들 때 우리는 고난의 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종말이 가깝다는 인식은 성도의 일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가?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말하며, '정신을 차리는 것'과 '깨어 있는 기도'를 그 핵심 행위로 제시한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단지 절제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말에 대한 긴장감 속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는 신앙적 태도이다. 기도는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동시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바른 길을 모색하는 열쇠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 베드로의 개인적 경험을 중요한 예로 자주 든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실 때, 기도하지 못하고 졸았던 전력이 있다(마 26:36 이하).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며(마 26:69~75), 치욕스럽고도 깊은 회한에 사로잡히는 실패를 맛보았다. 하지만 그랬던 베드로가 훗날 서신을 쓰면서 '깨어 기도하라'고 강조하는 모습은 역설적이면서도 매우 설득력 있다. 기도의 중요성을 몸소 깨달은 사람이기에, 교인들에게도 이 점을 가장 힘주어 권면한 것이다.
사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 4:1)고 말한다. 육체의 고난, 즉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는 논리다(벧전 4:2).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을 마음으로, 삶으로 깊이 체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정욕과 방탕의 길로 미끄러질 수 있다. 사도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던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말한다(벧전 4:3). 곧 과거의 죄된 삶을 떠나 거룩한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 동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안에서 진정으로 깨달아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도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3~4)며 믿음을 비웃는 이들을 경계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예로 들면서, 과거 노아 홍수 때 물심판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지적한다(벧후 3:6). 같은 방식으로 최후의 심판, 불심판도 반드시 임할 것이니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벧후 3:7, 10). 이러한 종말론적 진리는 베드로 시대뿐 아니라, 현대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장재형 목사는 종종 "하나님의 때는 시계로 측정되는 양적 시간이 아니라, 구속사(救贖史)가 성취되는 질적 시간이다"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성도는 이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주어진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 책임감 있게 살아내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종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삶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신다. 장재형 목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때가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기도의 습관, 기도의 능력"으로 요약하곤 한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와 기도 모임에서 경험하는 성령의 임재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큰 힘이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드리는 동시에, 그분의 음성을 청종(聽從)하는 쌍방향적 소통이다. 단순히 우리의 간구만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결단의 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베드로의 말씀을 2020년과 이후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붙드는 사람으로 살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세상의 조롱과 방탕, 혹은 회의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된다고 해서 우리도 함께 휩쓸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통해 성도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붙들어야 한다. 이처럼 종말론적 긴장감은 결코 두려움과 절망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크신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음을 믿고, 그분이 베푸시는 궁극적 승리와 영광을 사모하며, 현재를 소중하고도 진지하게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된다. 이것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는 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며, 깨어 기도하라는 베드로와 장재형 목사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Ⅱ.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은사를 활용해 봉사하라
베드로전서 4장 7절 이하에서 사도는 종말을 준비하는 실천적 지침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는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이다.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성도들 간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요 13:34~35)과 직결되는 명령이며, 새 계명의 완성이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 상황을 다루면서, "성도 간의 갈등을 푸는 길은 궁극적으로 사랑과 용서라는 복음의 원리에서 시작된다"고 자주 강조해 왔다. 사랑이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며, 때로는 상처와 아픔을 초월하는 '용서'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주님의 용서를 통해 다시금 제자의 자리로 회복되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을 더욱 힘주어 선포할 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가 먼저 받은 용서가 크면 클수록,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사랑과 용서 역시 커져야 한다(눅 7:47).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올 때마다, 혹은 새해를 맞이하기 직전에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쌓인 미움과 응어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 4:9)는 권면에 비추어 보아도, 나그네 된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대접하지 않는다면 교회 공동체의 본질이 훼손된다. 초대교회 시절 신자들은 대부분 사회적·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처지였고,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았기에 서로를 대접하고 돌보는 일이 절실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세상 한가운데서 '나그네'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좁은 시야에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연약함을 살피며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나그네를 돌보는 섬김의 정신을 가리켜, 구약적 개념인 '나그네 환대(레 19:33-40)고 말씀하셨다. 이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들을 향해 사랑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 준다. 대접이라 해서 꼭 물질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때로는 말 한마디의 위로, 시간과 관심을 내어 주는 일, 삶을 함께 나누는 경청 등이 필요하다. "원망 없이 하라"는 구절 또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점검하게 한다. 억지로 하거나, 의무감에 마지못해 하는 섬김은 결국 기쁨을 잃고 쉽사리 지치게 된다. 참된 섬김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근원이 되어야 하고, 이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사도 베드로는 이어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고 당부한다. 은사(카리스마)란 단어는 한글로 '은혜의 선물'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은사는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자랑이나 교만의 근거가 아니라 봉사의 도구가 된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 역시 여러 은사의 목록을 제시한다.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다스림, 구제, 방언, 지혜, 지식 등 성도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은사들이 궁극적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고전 14:12).
하지만 베드로는 은사의 목록을 세부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말씀을 전하는 은사', 다른 하나는 '봉사하는 은사'이다(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이는 설교자나 교사와 같은 역할, 그리고 행정·구제·돌봄 등 실제적 섬김의 역할을 크게 나눈 것이다. 말씀으로 섬기는 자는 자기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고, 봉사로 섬기는 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감당해야 한다. 이는 곧 모든 섬김과 봉사의 목적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벧전 4:11)에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란 부분을 대단히 강조한다. 인간적인 열심이나 에너지로만 봉사하려 하면,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고 지치게 된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충만함을 구하는 자는, 놀라운 재충전과 기쁨을 경험하면서 계속해서 봉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누군가는 예배 인도를 통해, 누군가는 가르침과 상담을 통해, 또 누군가는 재정적 후원을 통해, 어떤 이는 찬양으로, 또 다른 이는 관리와 청소, 음식 봉사로 교회를 세운다. 그 역할이 다양할지라도, 근본 동력은 같은 곳에서 나온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자세-이것이 곧 선한 청지기의 자세이다.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교회가 사회적으로 겪게 될 도전과 어려움은 더 커질 수 있다. 팬데믹 시기에도 그러했듯이, 신앙과 예배 생활이 제약을 받거나, 재정적·정신적 고난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때야말로 교회의 본질적 능력이 드러날 때다. 세상이 혼돈에 빠지고, 많은 이들이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을 때, 교회는 뜨거운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종종 가장 큰 위기와 시련 속에서"라고 말하곤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는 박해 시대나 전쟁과 전염병의 시기에 오히려 더욱 순수하고 담대한 믿음을 발휘했다. 병든 이들을 돌보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섬겼던 수많은 성도들의 삶은 교회의 존재 의미를 증명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내게 주어진 은사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과연 잘 활용하고 있는가?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타인을 섬기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의무감이나 억지로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 넘치는 감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점검이 필요하다. 또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씀을 체화하려면, 먼저 내가 받은 용서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을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 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협력의 자리로 초대할 수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갈등이 발생하거나, 신자 간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사랑으로 해결하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사랑이란 결코 갈등 자체를 외면하거나 무작정 덮어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한 논의와 대화를 충분히 나누되, 최종적인 목적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함께 성장하는 데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베드로가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말할 때, 그 배경에는 초대교회의 공동 식사와 교제 문화가 깔려 있다. 그들은 매번 식탁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재확인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식탁 교제, 혹은 소그룹 교제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자리에 참여하여 우리의 일상, 기도제목, 감사와 고민을 나눌 때, 사랑과 용서는 실천 가능한 현실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구성원들이 각각 받은 은사를 찾아 세우고,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 거점을 두고 각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되, 복음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는 통합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에 힘써 왔는데, 이는 결국 은사와 부르심에 맞게 일꾼들을 세우는 작업이다. 곧 어떤 이는 목회자로, 어떤 이는 찬양 사역자로, 어떤 이는 신학 연구자로, 또 어떤 이는 봉사와 구제 사역자로 세워지는 식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모든 직분과 은사가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더 큰 시너지와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4장 7~11절의 핵심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라'는 종말론적 인식과 함께, 구체적으로는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라",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 "각자 받은 은사로 봉사하라"는 세 가지 명령으로 요약된다. 그 목적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다(벧전 4:11).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의 일관된 강조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져도, 성도들은 희망과 거룩함을 지키며 끝까지 서로 사랑할 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 된 정체성을 증거하는 길이 된다.
특히 2020년에 맞닥뜨렸던 전 세계적 위기와, 그 이후로도 이어지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 말씀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위기가 길어질수록 우리 안에 있는 본능적 이기심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복음의 능력을 붙들어야 한다. 교회는 수동적으로 방어에만 급급하기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세상에 희망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통해,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과 빛을 비추신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와 강연에서 늘 "실천적 사랑과 봉사"를 강조하며, 그것이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로서는 결코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 불신앙적인 자세는 우리를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든다. 반면,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해 움직이는 교회 공동체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를 돌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깨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고, 병든 자를 돌보며, 외로운 자를 환대하고, 방황하는 영혼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일은 종말론적 대기(待機)를 실제 삶 속에서 풀어내는 구체적 모습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종말 시나리오에 대한 호기심이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한 경고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나는,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라는 근본 질문을 던지게 하는 동기 부여다. 정욕과 방탕으로 내달리는 세상의 흐름과 달리, 성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깨어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며 섬김에 헌신하라는 초대다. 이 초대에 응답하는 교회는 세상에 선한 빛을 비추고,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보기를 보여 주는 통로가 된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맺는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종말론과 교회 공동체의 실천은 결국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결론에 이른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 은사를 사용하는 힘조차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봉사의 결과로 인한 영광 또한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가 지녀야 할 마지막 관문이자,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헌신의 총합이다. 장재형 목사도 수많은 강의와 저술에서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청지기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자만이 끝까지 겸손과 사랑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다.
길고 복잡한 논의를 돌아 다시 정리하자면, 베드로전서 4장 7-11절의 말씀은 두 가지 소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깨어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종말론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더욱 진지하게 살도록 촉구하며, 정욕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한다. 그 삶의 태도는 '근신'과 '깨어 있는 기도'로 구체화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기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으며,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 과정을 통해 기도하지 않을 때 맞닥뜨리는 위험과, 기도할 때 누리는 회복의 은혜를 자주 설파해 왔다. 팬데믹이나 각종 재난이 닥쳐올 때, 교회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깨어 있는 기도'라는 사실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다.
둘째,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받은 은사로 봉사하라"**는 명령이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의 죄를 덮어 주는 사랑과, 나그네를 대접하는 섬김,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카리스마)를 활용해 봉사함으로써, 어두워진 시대 속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며, 모든 봉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감당하게 된다. 그 결과,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가고, 세상은 그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엿보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런 모습을 지닐 때, 종말이 다가올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진정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라 강조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선언은 절망적 선언이 아니라 희망적 초대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 땅에 충만한 의와 사랑을 이루실 것을 믿는 이들에게, 종말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와 설렘, 그리고 깨어 있음의 동기가 된다. 우리는 근신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뜨거운 사랑과 봉사로 실제 삶에서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 그리고 그 말씀을 지속해서 가르쳐 온 장재형 목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