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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 로마서 11장, 구원의 은혜는 자랑이 아니다

은식기를 훔친 손에 은촛대 두 개가 더 놓인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주교가 장발장에게 건네는 선물은 결백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다시 열어 주는 삶의 가능성이다. 이 장면을 떠올리며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로마서 11장 설교를 읽으면, 구원의 은혜가 왜 자기 자랑이 될 수 없는지 묻게 된다. 자격을 내세울 수 없었던 사람이 거저 받은 생명으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절망의 끝에서도, 은혜는 남은 자를 지킨다

로마서 9~11장을 흐르는 질문은 혈통과 자격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흔든다. 이스라엘에 속했다고 모두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아니며, 구원은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약속을 받은 백성 가운데 많은 이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했다는 결론으로 바꾸지 않는다.

로마서 11장 1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사실부터 이스라엘 안에 남은 자가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남은 자는 다른 사람보다 탁월해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존하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절망의 한복판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엘리야의 탄식도 그 자리를 비춘다.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한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셨다. 선지자의 눈에는 고립만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사람들은 그 시야 밖에도 있었다. 보이는 실패가 크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은혜까지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위로에는 자신을 낮추라는 요청이 함께 담겨 있다. 남은 자라는 이름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남겨 두신 은혜보다 자기 신실함을 더 크게 말하게 된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면 그것을 유지하고 완성하는 근거도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선택에 대한 성경 묵상은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를 가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가 누구에게 붙들려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바울에게 동족의 불신앙은 증오의 근거가 되지 않았다. 복음을 거절하는 현실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유대인을 향한 사랑을 놓지 않는 그의 태도가 중요하다. 선택과 유기를 다루는 신앙이 배타적인 자기만족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교리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이 화목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접붙임 받은 믿음은 뿌리 앞에서 낮아진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을 지나 복음은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한쪽이 밀려나고 다른 쪽이 승리한 이야기로 읽지 않는다. 이방인이 누리는 구원의 풍성함을 통해 이스라엘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란다. 로마서 11장 11~12절에서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설명도, 그들이 끝내 돌아오기를 바라는 방향 안에 놓인다. 그의 사도적 열심에는 복음의 확장과 동족의 회복을 향한 사랑이 함께 흐른다.

설교가 이 대목에서 요셉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내려간 비극은 끝내 그 형제들과 많은 생명을 살리는 길에 사용되었다. 사람의 악행과 불신앙이 역사의 마지막 말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 안에 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누군가의 불행을 기뻐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실패 너머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지 보여 준다. 원래 가지 가운데 일부가 불신앙으로 잘려 나가고, 돌감람나무의 가지가 접붙임을 받아 뿌리의 진액을 공급받는다. 가지에 생명이 흐른다고 해서 그 가지가 생명의 근원인 것은 아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통해 이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지워 버릴 이유가 아니라, 그 뿌리를 기억하며 감사할 이유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구원을 당연한 소유나 자신의 뛰어남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경계한다. 내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의 실패를 조롱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기억이 타인을 향한 긍휼의 출발점이 된다. 은혜를 공로로 바꾸는 순간, 감사는 사라지고 비교가 시작된다.

바울의 경고는 이 지점에서 준엄해진다. 원래 가지도 불신앙으로 잘려 나갔다면, 접붙임 받은 가지 역시 교만과 불신앙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은혜를 믿는다는 고백이 믿음의 순종을 저버려도 좋다는 허락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넘어짐을 바라볼 때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그보다 나은 내 모습이 아니라, 지금도 은혜를 의지하고 있는 내 믿음이다.

회개의 길이 남아 있기에, 소망은 문을 닫지 않는다

그러나 잘려 나간 가지가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이야기를 끝내지는 않는다. 로마서 11장 25~26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해져 있음을 말하며,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본다. 지금의 거절만으로 하나님의 약속 전체를 판단하지 않는 소망이다. 남은 자를 보존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들을 향해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닫지 않는다.

이 설교는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여러 신학적 해석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중심을 붙든다.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다는 사실이 그 기다림의 근거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결말을 바라보는 믿음은 인간의 낙관보다 약속하신 분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선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기다린다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오늘의 책임과도 연결된다. 이 설교는 세계 선교와 마지막 때의 소망을 따로 떼어 놓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함께 바라본다. 기다림은 다른 사람의 회복을 멀리서 관찰하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며 그 회복을 함께 구하는 삶이 된다.

이 소망은 회개를 필요 없게 만드는 낙관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면서 그분의 준엄하심을 지워 버릴 수는 없다. 설교의 흐름 안에서 주권적 은혜와 믿음의 순종은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불신앙에 대한 경고와 돌아오는 이를 다시 접붙이시는 약속도 함께 놓인다. 회개는 자신을 구원할 공로를 쌓는 일이 아니라, 고집하던 불신앙에서 돌이켜 그 은혜를 의지하는 응답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에도 다가온다. 누군가의 잘못을 분별하는 일과 그 사람의 회복을 포기하는 일은 같지 않다. 자신의 실패에는 사정을 헤아려 달라면서 타인의 실패에는 마지막 판결을 내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 아니라, 죄에 넘어진 사람을 향한 긍휼까지 잃지 않는 일이다.

구원의 깊이를 알수록, 믿음은 찬양으로 낮아진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넘어짐과 회복을 따라가던 바울의 논의는 마침내 찬양에 이른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그는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고백한다. 인간은 이 구원 계획의 설계자도, 하나님께 지혜를 보태는 조언자도 아니다. 이해한 것을 자랑하기보다 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 앞에 무릎을 꿇는 자리에서 신학적 통찰은 경외가 된다.

이 고백은 로마서 16장 2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과도 맞닿아 있다. 구원의 역사를 살핀 끝에 바울이 높이는 것은 자신의 설명이나 이방인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남은 자를 지키시고 낯선 가지를 접붙이시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시는 분께 영광이 돌아간다. 구원을 깊이 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서는 일이 아니라, 더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다.

장재형 목사가 이끄는 묵상도 이 찬양을 일상의 헌신으로 연결한다. 로마서 11장의 고백이 12장 1절에서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권면으로 이어지듯,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는 구체적인 삶을 향한다. 타인의 넘어짐을 비웃지 않는 말,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는 회개, 갈등 속에서도 화목을 구하는 순종이 그 응답이 된다. 믿음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남을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린 자리에서 사랑을 배우는 삶으로 깊어진다.

내게 흐르는 생명이 내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낮아진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내가 먼저 은혜를 입었다는 기억에서 자란다. 오늘 나는 받은 은혜로 나를 높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은혜 때문에 누군가를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가.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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