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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설교가 비추는 사랑과 배반의 십자가 은혜

향유가 방 안에 퍼지는 순간,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계산도 함께 드러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방을 열어 보이듯, 마태복음 26장의 장면은 사랑과 배반을 한 식탁 가까이에 세운다. 장재형목사 (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설교는 베다니의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사건과 유다의 배반을 나란히 바라보며, 복음이 우리 안의 믿음과 회개를 어떻게 깨우는지 묵상하게 한다. 한 사람은 받은 은혜 앞에서 가장 귀한 것을 드렸고, 한 사람은 같은 주님 앞에서 은 삼십을 계산했다.

이 대비가 오래 마음을 붙드는 이유는 사랑과 배반이 서로 먼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고, 모두 주님의 길을 보았다. 그러나 가까이 있음이 곧 사랑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본문은 그래서 과거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늘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허비라 부르는지 조용히 묻는다.

향유처럼 쏟아지는 복음의 은혜

베다니에서 한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제자들은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고 분노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이 좋은 일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눈에는 순간의 낭비처럼 보였던 행동이 주님의 눈에는 복음과 함께 기억될 사랑이었다. 이것이 이 장면의 첫 번째 역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랑이 효율의 언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풀어낸다. 향유의 가치는 시장에서 정할 수 있었지만, 여인의 마음은 가격표로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깨뜨린 것은 단지 옥합이 아니라, 계산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오래된 마음이었다. 받은 은혜가 너무 크면 사람은 더 이상 손익만으로 살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말하게 되리라고 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여인의 헌신은 십자가로 향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미리 비추는 작은 그림자와 같았다. 주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실 길 앞에서, 그녀는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아끼지 않았다. 사랑은 그렇게 자기 보존의 문을 열고, 은혜 앞에서 자신을 비운다.

그런 의미에서 향유는 물질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방향이다.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혜 안에서는 오히려 가장 깊은 자아를 되찾게 한다.

이 말씀의 흐름은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돌아온 아들의 비유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의 공정감각으로는 지나쳐 보이는 찾음과 잔치가, 예수님 안에서는 아버지 사랑의 얼굴이 된다. 사랑은 받을 만한 자격을 계산한 뒤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먼저 찾아오고 끝까지 품는 은혜다. 그러므로 옥합의 향기는 한 여인의 감격을 넘어, 복음이 어떤 세계인지를 말없이 증언한다.

계산이 믿음을 재판하는 자리

제자들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옳았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말은 정의롭게 들리고, 향유를 팔자는 판단은 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옳은 말이 언제나 사랑의 중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보여준다. 신앙은 때로 바른 명분을 붙들면서도 주님의 마음을 놓칠 수 있다.

이 설교의 신학적 통찰은 사랑과 정의를 단순히 대립시키지 않는 데 있다. 사랑은 정의를 무시하는 감상이 아니라, 정의가 생명을 향하도록 만드는 깊은 뿌리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를 말했지만 여인의 사랑은 보지 못했다. 그 순간 그들의 분별은 은혜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을 재판하는 잣대가 되었다.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왜 그렇게까지 드려야 하는가, 더 합리적인 방법은 없는가, 이 헌신이 정말 필요한가. 분별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랑보다 앞설 때 믿음은 차갑게 굳어진다. 사랑을 허비로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은 이미 십자가의 언어에서 멀어지고 있을 수 있다.

참된 사랑은 질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질서가 사람을 살리는 길에서 멀어질 때, 사랑은 그 질서를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돌려세운다. 여인의 행동을 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판단을 멈추게 하신 것은, 가난한 이를 향한 책임을 가볍게 여기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의 근원을 보지 못한 채 책임만 말할 때, 가장 거룩한 말도 차가운 비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공동체의 자리에서도 이 긴장은 반복된다. 누군가의 시간과 물질, 눈물의 섬김을 보며 우리는 때로 가치보다 비용을 먼저 헤아린다. 그러나 주님은 여인의 행동 속에서 낭비가 아니라 장례를 준비하는 깊은 사랑을 보셨다. 같은 사건을 보아도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향유의 가격을 말할 수도 있고 주님을 향한 마음을 볼 수도 있다.

배반은 멀리서 오지 않는 회개의 경고

옥합의 향기가 퍼진 뒤 복음서는 곧장 유다의 배반을 말한다. 열둘 중 하나였던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기면 무엇을 주겠느냐고 묻고, 은 삼십을 받은 뒤 배반의 길로 들어선다. 이 장면이 두려운 것은 유다가 처음부터 먼 곳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는 가까이 있었고, 말씀을 들었고, 주님의 사역을 보았다.

장재형목사 설교는 유다의 비극을 단순한 탐욕의 사건으로만 보지 않는다. 가까운 자리에서 사랑을 배웠음에도 그 사랑을 외면할 수 있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비춘다. 사랑이 식으면 작은 이익도 주님보다 커 보이고, 신앙의 언어를 익힌 사람도 복음의 길을 비효율로 여길 수 있다. 배반은 갑자기 떨어지는 돌이 아니라, 사랑을 계산으로 대체한 마음 안에서 조용히 자란다.

유다는 뒤늦게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회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여기서 본문은 우리에게 두려움만이 아니라 깨어 있음의 은혜를 준다. 오래 믿었다는 기억, 가까이 있었다는 자부심, 익숙한 경건의 말이 마음을 자동으로 지켜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회개는 정죄의 문이 아니라 다시 사랑 안에 서게 하는 길이다.

베드로의 실패와 유다의 절망이 다른 결말을 향해 간다는 사실도 우리를 멈추게 한다. 넘어짐 자체보다 더 깊은 문제는, 넘어졌을 때 어디로 돌아가느냐에 있다. 사랑을 놓친 마음은 죄책을 품고도 은혜의 문 앞에 서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 묵상은 유다를 향한 손가락질보다, 내 안에서 자라는 계산과 욕심을 먼저 보게 한다.

십자가 은혜가 남기는 소망의 질문

그럼에도 복음은 유다의 어둠에서 끝나지 않는다. 배반은 예수님의 사랑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배신까지 끌어안는 하나님의 길이 되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사랑이 계산보다 강하고, 은혜가 실패보다 깊으며, 소망이 절망보다 오래 견딘다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장재형목사 성경 묵상은 결국 우리를 두 인물 사이에 세운다. 한쪽에는 받은 사랑 때문에 가장 귀한 것을 깨뜨린 여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사랑을 허비로 여기며 스승을 넘긴 제자가 있다. 이 둘의 거리는 시간 속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는 매일 시간과 물질, 재능과 관계, 자아의 고집 앞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선택한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반드시 거대한 결단만을 뜻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섬김, 조용한 용서, 주님 앞에 내려놓는 고집, 복음을 위해 기쁘게 드리는 작은 순종도 향유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의 장부에서는 사라지는 비용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눈앞에서는 사랑의 향기로 남는다.

십자가 은혜 앞에서 순종은 억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응답이 된다. 여인은 누가 명령해서 옥합을 깬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사랑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기에 드렸다. 믿음도 그와 같다. 주님을 향한 순종은 먼저 사랑받은 사람이 마침내 자기 삶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 보이는 사건이다.

사랑의 길은 한 번의 감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늘 드린 것이 내일 다시 아까워질 수 있고, 어제의 순종이 오늘의 계산 앞에서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매일 십자가 앞에 자신을 데려가는 일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이 먼저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다시 듣고, 작은 옥합 하나를 깨뜨릴 용기를 얻는다.

이 선택은 특별한 종교적 순간에만 찾아오지 않는다. 가정의 말 한마디, 공동체 안의 작은 양보, 손해를 감수하는 섬김 속에서도 우리는 같은 갈림길을 지난다. 누군가를 품는 일이 내 계획을 흔들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옥합의 이야기는 오늘의 말씀으로 되살아난다.

오늘 우리 손에 들린 옥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깨뜨리기 전, 우리 안에서 먼저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랑의 고백인가, 아니면 "이것을 허비하느냐"는 오래된 계산인가.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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