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의 개념마저 흔들리고, 서로의 언어와 세계관이 단절된 시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를 방불케 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는 책 <시대와 영성을 묻다>가 출간됐다.
이 책은 현대 사회를 통찰력 있게 읽어 온 팀 켈러와 세상과 교회의 접점을 확장해 온 법학자 존 이나주, 그리고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해 온 10인의 필진이 함께 쓴 공저다. 신학자와 목회자, 의사와 선교사, 교수와 작가, 힙합 뮤지션과 싱어송라이터 등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살아 낸 이들이, 혼돈의 시대 한복판으로 들어가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길을 모색한다.
공격도 동화도 아닌, ‘성육신적 참여’의 길
<시대와 영성을 묻다>는 분열과 혐오가 일상이 된 사회를 외면하지 않는다. 단순한 의견 충돌을 넘어, 언어와 세계관 자체가 갈라진 현실을 직시한다. 필자들은 탈기독교 시대를 단순히 위기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선교적 기회로 읽어 내며, 공격적 변증이나 무분별한 문화적 동화를 경계한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아 세상 속으로 들어가 관계를 맺고, 차이 속에서도 다리를 놓는 ‘관계적 선교’를 제시한다.
책은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그 방향을 구체화한다.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셨던 장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던 사건, 십자가 위 강도에게 건네신 약속은 모두 ‘안전지대’ 밖으로 나아간 참여의 모습이다. 저자들은 그리스도인이란 복음에 대한 확신을 붙들고, 차이와 긴장 속에서도 예수님이 사신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확신 있는 다원주의’와 공적 신앙
책은 분열된 정치·문화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할 태도로 ‘겸손, 인내, 관용’을 강조한다. 특히 존 이나주가 제안한 ‘확신 있는 다원주의’는, 신념을 분명히 하되 타인을 존중하며 공존을 모색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시민권을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이 땅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정의와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이는 성경의 긴장 구조와 맞닿아 있다. 바울은 하늘 시민권을 강조하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적극 활용했다.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의 번영을 구하라 명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낯선 땅에서도 가장 진취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 맛을 내는 존재를 넘어 ‘거름’이 되다
이 책은 ‘소금’의 비유를 새롭게 해석한다. 소금이 단지 맛을 더하거나 부패를 막는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황폐한 땅에 생명을 일으키는 ‘거름’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섞여 들어가 성장과 회복을 촉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피해 은둔하거나, 반대로 무비판적으로 동화되는 양극단을 넘어서는 적극적 참여를 의미한다.
필자들은 “선을 긋는 일은 최대한 아끼라”고 권한다. 불의와 악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리를 두되, 가능한 범위 안에서 공통점을 찾고 협력하라는 제안이다. 그 근거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에 대한 신뢰다.
언어를 넘어, 말씀으로
책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는 점도 짚는다. 격한 비난과 독설은 즉각적 만족을 줄 수 있으나, 관계를 세우지는 못한다. 겸손하고 사랑이 담긴 언어로 확신을 표현하는 훈련은 쉽지 않지만, 그 과정 속에서 공동체는 성숙해 간다. 동시에 저자들은 언어의 한계도 인정한다. 말 자체가 구원이 될 수 없으며, 결국 모든 말은 ‘말씀이신 분’께로 이끌릴 때에만 제 역할을 한다는 고백이다.
평화를 이루는 자로 부름받다
<시대와 영성을 묻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순히 혜택을 소비하는 자의 자리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팔복 가운데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평화를 이루는 자’의 복을 언급하며, 평화를 만들어 내는 책임을 감당할 때 비로소 신자의 삶이 완성되어 간다고 말한다. 온유와 겸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평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통찰도 덧붙인다.
이 책은 특정 집단을 위한 전략서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세계 사이에서 번역자로 살아가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초대다. 교회와 세상, 학문과 신앙, 문화와 복음 사이에서 두 발을 모두 딛고 서는 법을 모색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