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

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 - 초대교회 공동체의 구현

초대교회형 공동체를 말하면 많은 이들이 먼저 '따뜻한 분위기'를 상상한다. 서로를 잘 이해해 주고, 갈등 없이 웃으며, 필요를 채워 주는 이상향 같은 장면 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그려 내는 교회는 결코 낭만의 실내 정원만은 아니다. 그곳에는 갈라짐의 위험도 있었고, 오해와 두려움도 있었으며, 때로는 사람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무너지지 않았던 까닭은, 공동체의 도덕성이 평균 이상이어서가 아니라 성령이 그들의 관계를 새로 짜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그들의 세계관을 재배열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가 사도행전강해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결이다. 초대교회형 공동체는 '좋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십자가와 부활신앙이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작업장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교회성장전략은 눈에 띄는 기술이기보다, 케리그마(말씀선포)가 공동체의 중심을 정렬하고, 케노시스(비움)가 권위의 방식을 바꾸며, 코이노니아(교제)가 삶의 리듬을 새로 짜는 장기적 형성의 과정에 가깝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2장의 한 구절을 길게 붙들고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으로 청중을 이끈다. 그가 자주 주목하는 사도행전 2:23은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라는 두 표현을 한 문장 속에 결박해 둔다. 이 두 표현은 하나님의섭리와 인간의 책임, 구원의 신비와 역사적 폭력성을 동시에 놓아두고, 둘 중 하나를 제거해 안심하고 싶은 우리의 습관을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역사의 시나리오라기보다, 역사를 비추는 영적 스크린에 비유하며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반대로 인간의 손으로 십자가를 세웠다면 그 죄의 무게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가 여기서 택하는 방향은 면책도, 냉혹한 운명론도 아니다. 정하신 뜻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금속성의 결론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이 실제로 발생할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섭리의 호흡이며, 미리 아심은 인간을 조종하는 감시가 아니라 인간의 비극과 폭력을 끝내 복음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하나님의 인내라는 것이다. 이 인내가 없다면 십자가는 단지 처형 도구로 남겠지만, 이 인내가 있기에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으로 전환되고, 공동체는 그 사건 앞에서 자기 변명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그는 이런 거대한 개념을 차가운 논리로만 전달하지 않기 위해, 때때로 예술의 어휘를 빌린다. 예술은 교리를 대신하지 않지만 교리가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지층, 곧 수치심과 억울함, 분노와 포기, 그리고 "나는 실패했다"는 깊은 자기 선언의 자리까지 내려가 손을 내민다. 장재형목사의 사도행전강해가 가진 독특한 힘은, 성경을 정보의 텍스트로 읽는 습관에서 성경을 사건의 언어로 읽는 감각으로 이동시키는 데에 있다. 십자가는 교리의 표지판이 아니라 인간 폭력의 실재이며, 부활은 도덕적 낙관이 아니라 절망 한복판을 통과해 새로운 문법을 발생시키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성령강림은 개인의 감정 고조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조를 재편하는 신적 개입이다. 이 틀 안에서 교회성장전략은 '더 크게,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깊게, 더 진실하게'로 방향을 전환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의 외연적 확장이 가능한지 여부를 묻기 전에, 교회의 내적 중심이 무엇에 고정되어 있는지 먼저 질문한다. 중심이 복음이 아니라 성취가 되면 공동체는 경쟁의 언어를 배운다. 중심이 복음이면 공동체는 회개와 믿음의 언어, 곧 다시 시작하는 언어를 배운다.

초대교회형 공동체의 첫 호흡은 케리그마다. 사도행전의 첫 설교는 설득을 위한 수사학이라기보다 사건을 향한 선포다.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문장이 공적으로 울려 퍼질 때, 개인의 내면은 더 이상 사적 감정의 저장고에 머물지 않는다. 그 선포는 삶의 구조를 흔든다. 장재형목사는 말씀선포를 단지 강단의 이벤트로 축소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장기적 교육으로 본다. 여기서 언어는 단어의 선택만이 아니라 인식의 틀이다. 은혜와 평강이 인사말로만 남으면 교회는 종교적 장식이 되지만, 은혜와 평강이 갈등을 다루는 방식과 돈을 다루는 태도, 약자를 대하는 감수성, 시간을 사용하는 윤리로 번역되면 그 인사말은 공동체의 공기가 된다. 케리그마는 결국 "무엇을 믿느냐"를 넘어 "무엇을 사랑하느냐"를 드러내는 힘이다. 그래서 회개와믿음은 한 번의 감정적 결단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을 삶의 중심으로 계속 옮겨 두는 반복적 전환이며, "돌이킴"이 습관이 될 때 공동체는 단단해진다.

케리그마가 중심을 세운다면, 케노시스는 그 중심이 권력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 주는 방식이다. 공동체가 성장하고 사역이 확장될수록 조직과 시스템이 필요해진다. 시스템은 효율을 주지만 동시에 사람을 도구로 바꿀 위험을 품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위험을 교회론의 핵심 문제로 다룬다. 교회는 '효율적인 종교 조직'이 아니라 '십자가의 양식으로 작동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케노시스는 단순한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예수의 자기 비움이 리더십의 문법으로 번역되는 사건이다. 누군가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갈 수 있는 자유, 칭찬을 받을수록 더 깊이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용기, 결과가 좋아질수록 더 많이 공동체의 몫으로 돌릴 수 있는 절제, 이것이 케노시스의 현실적 얼굴이다. 장재형목사가 '비움'을 강조할 때 그 비움은 자아를 지우는 자기학대가 아니라, 자아를 우상화하는 습관을 내려놓는 영적 훈련에 가깝다. 공동체는 비움의 훈련이 있을 때만 건강하게 커진다. 그렇지 않으면 커지는 속도만큼 균열도 커지고, 조직의 규모만큼 상처의 규모도 커진다.

코이노니아는 케리그마와 케노시스가 현실의 생활 형태로 굳어지는 자리다. 초대교회는 단지 함께 모이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새로 실험한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되는 가르침과 교제, 떡떼임과 기도는 따로 떨어진 네 가지 항목이 아니라 하나의 호흡이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를 등지지 못했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굶주린 이웃을 모른 척할 수 없었으며, 떡을 떼는 사람들은 소유를 절대화할 수 없었다. 장재형목사는 코이노니아를 '좋은 분위기'로만 이해하면 쉽게 지치고 쉽게 상처받는다고 말한다. 코이노니아는 감정의 친밀감에만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규율이기도 하고, 약속이기도 하며, 사랑을 훈련하는 공동체적 계약이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섬세함, 필요를 읽어 내는 관찰, 갈등을 덮는 침묵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용기, 그리고 용서를 값싸게 남발하지 않으면서도 회복을 포기하지 않는 인내, 이것들이 코이노니아의 실제다. 초대교회형 공동체가 "사랑의공동체"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훈련이기 때문이다.

이 일상의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성만찬과 떡떼임이다. 떡을 뗀다는 행위는 단순히 예전의 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세계관을 재설정하는 사건이다. 한 빵을 나눈다는 것은 내 생존이 타인의 생존과 분리될 수 없다는 선언이며, "내 몫"이라는 단단한 경계를 부드럽게 무너뜨리는 반복적 훈련이다. 장재형목사는 성만찬이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면 쉽게 신비주의적 장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계한다. 떡떼임이 삶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성만찬은 공동체의 양심을 깨우는 대신 공동체의 자기만족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만찬이 공동체의 윤리로 흘러갈 때, 떡떼임은 사회적 책임의 시작이 된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손길, 외로운 이들을 향한 환대, 상처 입은 자들을 향한 돌봄, 그리고 불의한 구조를 향한 성찰이, 결국 "우리가 한 몸이다"라는 식탁의 고백에서 출발한다.

이 지점에서 한 점의 명화가 초대교회적 떡떼임과 부활신앙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비춘다.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만찬〉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는 제자들의 순간을 빛과 어둠의 극단적 대비로 붙잡는다. 식탁 위의 빵과 과일은 단지 정물로 놓여 있지 않고, "알아봄"의 폭발을 준비하는 무대가 된다. 놀라움으로 벌어진 팔과 앞으로 쏟아지는 몸짓은, 부활신앙이 지적 확신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반응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떡떼임의 신학도 이와 닮아 있다. 부활은 교리적 결론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식탁에서 형태를 얻는다. 누군가가 자기 몫을 내려놓고 타인의 몫을 챙기는 순간, 누군가가 실패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순간, 누군가가 분노를 진실로 바꾸고 용서를 선택하는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기도생활과 말씀선포의 리듬 속에서 반복될 때, 공동체는 "주님이 여기 계신다"는 인식을 감각적으로 획득한다. 교회는 건물의 조명이 아니라, 엠마오의 식탁처럼 삶의 어둠 속에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작은 등불을 발생시키는 관계의 장이 된다. 이 빛은 성공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상처 난 사람을 숨 쉬게 하는 작은 등불이다.

장재형목사 설교가 '성령공동체'를 말할 때, 그는 성령을 개인의 사적인 영적 체험으로만 환원하지 않는다. 성령은 내 마음을 위로하는 바람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바람이다. 성령이 임하면 언어가 바뀐다. 같은 사실을 말해도 공격이 아니라 책임으로 말하고, 논쟁이 아니라 회개로 말하고, 정보가 아니라 증언으로 말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시간도 바뀐다. 소비와 과로의 시간표가 아니라 예배와 돌봄의 시간표가 만들어지고, 스케줄의 우선순위가 '성과'에서 '사람'으로 이동한다. 성령이 임하면 돈도 바뀐다. 소유가 정체성을 보증하는 세계에서, 나눔이 정체성을 드러내는 세계로 옮겨 간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전환을 교회론의 언어로 설명한다. 교회는 성령이 빚으시는 사회적 몸이며, 그 몸은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대안적 공동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형 공동체를 구현한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외형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공동체의 감각과 제도를 다시 빚어 가는 과정에 순종하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그 과정의 동력이다. 장재형목사는 "성령강림 이전에 부활이 있었다"는 문장으로 교회 에너지의 원천을 분명히 한다. 부활은 위로의 메시지이기 전에 세계관의 재편이다. 십자가가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실패의 의미를 다시 정의한다. 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결말을 독점하시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신다는 확신이 공동체의 정서적 바닥을 단단히 한다. 이 확신이 없으면 공동체는 쉽게 분열한다. 상처가 생길 때마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사람들은 더 안전해 보이는 작은 집단으로 쪼개지거나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한다. 상처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절망의 문법에 굴복하지 않는 힘, 그 힘이 코이노니아를 지속시키는 연료가 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가 회개와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가 감정의 고조로만 유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회개는 자기비난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며, 믿음은 들끓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을 유지하는 지속력이다. 개인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것이 기도생활이라면, 공동체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것은 서로의 신앙을 기억해 주는 연대다.

이런 흐름에서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교회성장전략은 '성공 공식'이라기보다 '성령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지혜다. 설교가 화려하면 사람이 모일 수 있고, 건물이 커지면 시야도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형 공동체가 성장한 방식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무엇을 소비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를 선택했고,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훈련했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의 현실 속에서 성장의 언어가 시장의 언어를 닮을수록 교회가 사람을 '사용자'로 취급할 위험이 커진다고 진단한다. 반대로 공동체의 중심이 케리그마와 성만찬, 기도생활과 돌봄으로 정렬될수록 교회는 사람을 '증언자'로 세운다. 증언자가 많아질수록 공동체는 복제된다. 여기서 복제는 동일한 브랜드의 확장이 아니라 동일한 복음의 생명력이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현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실천은 단순하지만 깊다. 말씀선포가 주일에만 머물지 않도록 평일의 교육과 묵상 리듬을 세우고, 기도생활이 개인의 열심으로만 남지 않도록 공동체적 중보의 습관을 만든다. 성만찬이 연중행사로 약화되지 않도록 식탁의 의미를 반복해서 해석하고, 떡떼임이 실제 나눔으로 연결되도록 돌봄의 통로를 만든다. 또한 새가족을 단지 환영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관계 속에서 배우고 섬기고 책임지는 제자도의 경로에 올려놓는다. 이것은 '빠른 확장'을 목표로 하는 성장이 아니라 '깊은 정착'을 목표로 하는 성장이며, 성장의 속도를 늦추는 듯 보일지라도 성장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전략이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코이노니아는 더 어려워진다. 연결은 쉬워졌지만 실제로는 더 고립되기 쉽고, 정보는 넘치지만 관계는 얕아지기 쉽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시대적 조건 속에서 초대교회형 공동체를 구현하려면, 친교를 '콘텐츠'가 아니라 '헌신'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의 근황을 아는 수준을 넘어, 서로의 무너짐을 책임지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온라인의 소통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라, 온라인이 제공하지 못하는 몸의 언어-함께 식사하고, 함께 울고, 함께 걸으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초대교회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했다는 구절은, 장소의 문제라기보다 생활의 태도에 관한 증언이다. 집은 제도가 아니지만, 집은 가장 구체적인 삶의 단위다. 그 단위가 복음의 영향 아래 놓일 때, 교회는 비로소 '주중에도 교회'가 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초대교회형 공동체는 바로 그 주중성, 그 일상성, 그 생활성에 무게를 둔다.

이러한 주중성의 회복은 결국 기도생활의 회복과 맞물린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기도는 개인의 내면을 정리하는 사적 행위인 동시에 공동체가 하나님의섭리 앞에서 자기 속도를 조절하는 공적 행위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는 자기 확신에 쉽게 취하지만, 함께 기도할 때는 서로의 호흡과 눈물을 통해 자신의 시야가 좁았음을 배운다. 기도가 깊어지면 말씀선포도 달라진다.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곧바로 공동체의 대화와 돌봄, 경제적 선택과 시간 사용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성령께서 통로를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 통로가 열릴 때, 회개와믿음은 '감동'의 기억이 아니라 '반복되는 방향'이 되고, 성만찬의 은총은 예배당의 경계를 넘어 일터와 가정, 거리와 학교 속으로 확장된다. 초대교회가 기도와 떡떼임을 분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성령공동체도 기도와 실천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 결합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교회성장전략의 숨은 뼈대다. 기도는 공동체의 체온을 지키는 가장 조용한 불씨가 된다.

초대교회형 공동체의 구현은 사회적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로마의 권력과 경제 구조를 단숨에 전복하지는 못했지만, 그 구조가 생산하는 고립과 배제를 다른 방식으로 견뎠다. 때로는 박해 속에서 흩어지면서도, 흩어짐 자체를 선교의 동선으로 바꾸었고, 가난한 이들이 더 가난해질 때 식탁을 열어 생존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섭리를 말하면서도 현실의 고통을 낭만화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섭리는 고통을 정당화하는 구호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의 언어다. 그러므로 섭리를 말하는 공동체는 약자의 울음을 더 민감하게 듣고, 불평등의 구조를 더 날카롭게 인식하며, 생태 위기의 징후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십자가는 개인의 죄책감만을 다루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사건이며, 부활은 그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자 새로운 창조의 약속이다. 이 신학적 방향성은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한다. 공동체가 지역사회와 연결되고, 약자의 존엄이 지켜지며, 상처 난 이들이 보호받는 자리에서 교회는 세상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파송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성만찬을 그런 공공성으로 가는 통로로 이해한다. 떡떼임은 예배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윤리의 시작이다. 공동체가 성만찬을 자주 기념한다는 것은 단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 세계관이 반복해서 부서지고 다시 재구성되는 훈련을 한다는 뜻이다. 그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쉽게 자기 보호 기제로 변한다. 그러나 떡떼임이 공동체의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 회개와 믿음도 개인의 내면적 드라마를 넘어 공동체적 책임으로 확장된다. 누군가가 상처를 고백할 때 공동체는 그를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돌봄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가 죄를 인정할 때 공동체는 그를 배제하기보다 회복의 길을 함께 걷는다. 여기서 회복은 정의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말하는 회복은 책임을 회피하는 면죄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방식이 바뀌는 새로운 윤리다. 그래서 사랑의공동체는 감정적 온기로만 정의되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책임을 묻고 다시 세우는 성숙한 관계의 질로 증명된다. 은혜와 평강은 이 성숙의 결과로 드러나며, 동시에 그 성숙을 다시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언어가 된다.

초기기독교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초대교회는 오히려 갈등을 통해 정체성을 선명하게 했다. 유대적 전통과 이방인의 삶이 충돌하던 자리에서, 교회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더 분명히 물었다. 그 질문의 결론이 배제의 강화가 아니라 환대의 확장이었다는 점은 오늘의 교회에 강력한 힌트를 준다. 문화가 바뀌고 세대가 갈라지고 정치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교회는 쉽게 진영화된다. 그러나 초대교회형 공동체는 진영의 언어보다 복음의 언어를 먼저 배운다. 케리그마는 진영의 확성기가 아니라 십자가의 빛으로 모든 진영을 비추는 선언이다. 케노시스는 상대를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내가 내려갈수록 공동체가 살아난다는 복음의 역설이다. 코이노니아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취향의 연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 훈련되는 낯설고도 거룩한 동행이다. 이런 동행이 가능한 이유는 공동체가 기도생활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는 감정을 달래는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기 욕망을 맞추는 훈련이며, 말의 속도를 늦추고 분노의 온도를 낮추며, 상대를 적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성령의 손에 맡기는 선택이다.

복음으로의 회복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오늘의 도시는 초대교회의 도시와 다르지만, 인간의 고독과 불안, 욕망과 수치심은 여전히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가 자주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고전적 문구가 아니라 파편화된 시대를 치유하는 대안적 언어다. 은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선물이며, 평강은 그 선물이 관계와 제도, 경제와 문화 속으로 번져 나가는 방식이다. 공동체가 은혜를 말하면서도 타인을 압박한다면 그 은혜는 값싼 언어가 되고, 공동체가 평강을 말하면서도 약자를 희생시키면 그 평강은 거짓이 된다. 따라서 초대교회형 공동체의 구현은 언어와 삶을 일치시키는 고된 작업이며, 장재형목사 설교가 촉구하는 것은 바로 그 일치의 길이다. 그 길에서 성령은 우리의 급함을 다듬고, 십자가는 우리의 자만을 부수며, 부활신앙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믿고 어떤 이야기에 끌려가는가. 우리는 십자가를 단지 '구원의 도구'로만 소비하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통해 권력과 폭력의 작동 방식을 성찰하고 케노시스의 삶으로 재배치되는가. 우리는 부활을 단지 '사후 보장'으로 축소하는가, 아니면 부활신앙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실패와 상실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타인을 살리는 선택을 할 용기를 얻는가. 우리는 성만찬과 떡떼임을 단지 예전의 순서로 치르는가, 아니면 그 식탁이 우리를 한 몸으로 묶고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사건임을 받아들이는가. 이런 질문에 공동체가 정직하게 답할 때, 교회는 '성장'이라는 말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성장한다는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이고, 더 넓은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서 더 오래 섬기는 것이며, 더 큰 목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더 맑은 증언을 갖는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초대교회형 공동체 구상은 한 가지 상상력으로 수렴된다. 교회는 세상의 피로를 흡수해 버리는 스펀지가 아니라, 세상의 피로를 복음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 소망의 방향으로 돌려 세우는 발화점이어야 한다는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은 케리그마로 시작해 케노시스를 통과하고 코이노니아로 구체화되며, 예수그리스도십자가의 깊이와 부활신앙의 높이를 함께 호흡한다. 그리고 그 호흡이 기도생활의 리듬으로 유지될 때 공동체는 성령의 손길에 의해 계속 교정되고 새로워진다. 초대교회형 공동체는 완성된 건축물이 아니라, 성령이 매일 리모델링하는 거처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이상향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에서 복음이 실제가 되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공동체가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견딜 때, 교회는 자기 증명의 무대가 아니라 은혜의 증언대가 되고, 성장의 집착이 아니라 성숙의 기쁨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성숙은, 초대교회의 불길이 오늘 우리의 삶 속으로 다시 돌아오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식이 된다.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