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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읽는 요한복음 21장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덧붙여진 결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활 신앙이 삶과 공동체를 어떻게 다시 배열하는지 보여 주는 가장 현실적인 에필로그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이미 "기록된 목적"이 선명하게 선언된 뒤에도 21장이 남아 있는 이유는, 부활이 단지 교리적 결론이 아니라 제자들의 일상과 교회의 방향을 새로 정렬하는 시작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는 이 장을 단순한 베드로 개인의 회복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는 요한복음 21장을 부활 이후 공동체가 어떤 좌표를 따라 항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항해를 가능케 하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신앙의 방향성' 본문으로 읽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패를 해설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패 한가운데서 다시 길을 여시며, 그 길의 목적지를 "나를 따르라"는 한 문장 안에 압축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첫 장처럼 읽힌다.

갈릴리 바다에서 시작되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평범하다. 기적의 무대는 성전도, 회당도, 도시의 광장도 아니라 밤샘 노동이 반복되는 생계의 현장이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다시 그물과 배로 돌아간 것은,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갈피를 잃은 영혼이 습관의 언어로 몸을 옮기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한다. "열심"은 있었으나 "방향"이 흐릿해진 상태, 성실하지만 공허한 밤이다. 그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요한복음 특유의 상징 언어에서 밤은 종종 분별의 결핍, 두려움, 인간의 자기중심적 계산을 비춘다.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어둠의 리듬에 갇힐 수 있다. 그러나 새벽, 곧 빛이 번지는 시간에 예수님이 해변에 서신다. 이 대비는 부활의 의미를 감각적으로 각인한다. 부활은 어둠을 부정하는 낭만적 선언이 아니라, 어둠의 물성을 뚫고 들어와 새로운 아침을 여는 실제적 능력이다.

예수님은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라고 묻는다. 질문은 몰아세우는 심문이 아니라, 제자들이 자기 현실을 정직하게 말하게 만드는 초대다. "없습니다." 이 짧은 고백 속에 한계, 공허, 좌절, 그리고 방향 상실이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첫걸음을 '있음'을 과시하는 데서가 아니라 '없음'을 고백하는 데서 찾는다. 자기 확신이 무너질 때 비로소 말씀의 확신이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예수님은 곧바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신다. 명령은 기술적 조언처럼 들릴 수 있지만, 본질은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순종의 방향 전환이다. 제자들은 밤새 같은 방식으로 애썼다. 그러나 새벽의 한 문장은 그들의 노동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물은 찢어질 듯 차오르지만 찢어지지 않는다. 풍성함과 보존, 확장과 일치가 동시에 일어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그물 가득 고기를 신앙의 방향성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 해석한다. 실패의 원인이 노력 부족이 아니라 방향의 불일치일 때가 있다는 통찰이다. 삶의 문제를 "더 열심히"로만 해결하려는 습관은 신앙을 피로하게 만들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를 향해 던질 것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방향은 곧 관계의 방향이다.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누구의 뜻을 기준으로 선택하며, 무엇을 '성공'이라 부르는가가 신앙의 방향을 결정한다. 요한복음 21장의 기적은 단순한 물고기 증식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의 현실 한가운데서 "나와의 관계를 기준축으로 삼아라"라고 요청하시는 사건이다. 주님이 계신 방향으로 그물을 던질 때, 즉 주님의 말씀에 맞추어 삶의 궤도를 조정할 때, 결과의 풍성함은 인간이 계산한 기대치를 넘어선다. 장재형목사가 요한복음 21장 설교에서 반복해 말하듯, 신앙은 '노력의 경주'이기 전에 '방향의 순종'이다.

이 기적은 성경 전체의 서사 속에서도 의미가 깊다. 사역 초기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물과 고기라는 언어로 소명을 시작하셨듯이, 부활 이후에도 같은 언어로 그들을 다시 부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소명의 재점화"로 설명한다. 부활은 과거를 지우는 능력이 아니라, 과거에 주셨던 부르심을 더 깊은 사랑과 더 정확한 방향 위에서 다시 살려 내는 능력이다. 베드로에게 부활은 두 번째 기회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가 달라진 첫 번째 기회다. 실패를 통과한 사람은 이전과 같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같은 바다, 같은 그물, 같은 배처럼 보이지만, 이제는 "말씀"이라는 중심축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본문이 "153마리"라는 구체적 숫자를 기록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교회 전통은 이 숫자를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해 왔지만, 무엇보다 이 기록은 기적을 '막연한 감동'으로 흐릿하게 만들지 않고, 실재의 무게로 붙잡아 둔다. 부활 신앙은 관념적 열광이 아니라, 셀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열매와 책임을 동반한다. 그물은 가득 찼고, 제자들은 그 무게를 함께 끌어올려야 했다. 풍성함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소명이다. 장재형목사가 교회의 사명을 "열매"와 "사명"을 분리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혜는 우리를 쉬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함께 움직이게 한다. 단독 플레이어가 아니라 공동체의 몸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다.

이 장면에서 사랑받는 제자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순간 또한 중요하다. 풍성한 결과가 주님을 알아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결과를 새롭게 해석하게 만든다. 신앙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추론'하는 합리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봄'으로 일상의 사건을 재배치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든다. 움직임에는 열정이 있지만, 동시에 회피할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하겠다는 결단이 섞여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부활의 능력을 "기억을 변형시키는 능력"으로도 설명한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과거가 우리를 규정하는 방식을 바꾸신다. 부활은 죄책감의 사슬을 끊되, 책임의 실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방식이다.

해변의 숯불은 요한복음 18장의 숯불을 떠올리게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 차가운 기억이, 부활 이후에는 따뜻한 아침 식탁의 배경으로 다시 등장한다. 예수님은 실패를 삭제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의 장소를 회복의 장소로 바꾸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초대는 설교보다 먼저다.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공동체를 먹이시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그 다음에 사명을 맡기신다. 여기서 준비된 빵과 생선은 요한복음 6장의 먹이심을 연상시키며, 교회의 삶이 결국 말씀과 식탁, 돌봄과 교제의 리듬 위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장재형목사가 교회의 사명을 말할 때 '돌봄'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부활 공동체의 출발이 바로 이 식탁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큰 무대를 세우기 전에, 먼저 상처 난 사람을 앉히고 먹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어지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은 베드로를 몰아붙이는 재판이 아니라, 관계를 새로 설정하는 서약의 언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제자도의 핵심을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진실성'으로 본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방식으로 사랑을 사명으로 전환시키신다. 사랑은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타자를 먹이고 지키는 책임으로 번역된다. 교회가 부활의 능력을 말할 때 그 능력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는 '돌봄'이며, 가장 성경적인 권능은 '양을 먹이는 힘'이다. 이 장면은 리더십의 자격을 재정의한다. 카리스마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 공동체를 돌보는 권한의 근거가 된다.

원문이 담고 있는 사랑의 어휘 차이를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의 사랑을 '측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자기 수준에서 정직하게 고백하도록 이끌어, 그 정직한 고백 위에 사명을 세우려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더 이상 자기 의로움으로 서지 않고 주님의 아심, 곧 주님의 통찰과 은혜 위에 선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언어가 아름다움만을 추구할 때 오히려 진실을 놓칠 수 있다고 말한다. 주님은 과장된 고백보다 진실한 고백을 통해 더 깊은 사랑으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회복은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책임이 다시 세워지는 사건이다. 사랑의 고백이 반복될수록 베드로의 시선은 자기 실패에서 주님의 얼굴로 이동하고, 그 이동이 곧 신앙의 방향 전환이 된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물로 사람을 모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양을 먹이라'고도 말씀하신다. 이 전환은 교회의 사명 이해를 균형 있게 만든다. 그물은 확장과 선교의 상징이라면, 양을 먹이는 일은 양육과 돌봄, 지속적인 영적 성장의 상징이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이 교회를 단순한 전도 조직으로 만들지 않고, 동시에 내향적 돌봄 공동체로만 머물게 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사람을 품되, 품은 사람을 먹여야 한다. 열매를 맺되, 그 열매가 공동체를 찢지 않도록 그물을 보전해야 한다. 현대 교회가 성과와 규모의 언어에 쉽게 포획될 때, 요한복음 21장은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라는 상징으로 우리를 다시 붙든다. 다양성과 차이가 증폭되는 시대일수록,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랑이며,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부활의 능력은 바로 그 사랑의 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베드로의 미래를 예고하신다. "네 팔을 벌리며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은 제자도의 낭만을 걷어 내고 십자가의 실재를 드러낸다. 부활 신앙은 고난을 회피하는 면죄부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방향 감각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교회가 부활의 능력을 말할 때 승리주의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활의 능력은 세상의 권력과 경쟁하는 세속적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의 능력은 두려움의 질서를 넘어, 사랑을 끝까지 선택하게 만드는 내적 힘이다. 결국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과거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채찍이 아니라, 미래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다. 부활 이후의 제자도는 더 가벼운 삶이 아니라 더 깊은 삶이며, 그 깊이는 고난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고난은 파괴가 아니라 증언의 방식이 된다.

베드로가 사랑받는 제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묻는 장면은, 신앙의 방향이 흐려지는 대표적 유혹을 보여 준다. 비교는 영혼의 나침반을 왜곡하고, 공동체를 경쟁의 장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가 머물러 있기를 내가 원하노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교회가 각 사람의 소명을 존중하는 성숙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부활 공동체는 동일한 재능을 복제하는 조직이 아니라, 다양한 부르심이 한 주님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연결되는 몸이다. 또한 요한복음 21장은 사랑받는 제자에 관한 소문을 정리하며, 예수님이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공동체는 소문과 추측이 아니라 증언과 진리 위에 서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요한복음 21장을 '교회의 새 출발'로 읽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교회를 자극적인 이야기의 파도에서 건져 내어 "기록"과 "증언"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 역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이 희미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은 교회에게 "증언의 윤리"를 회복하라고 요청한다. 과장된 이야기보다 검증된 진실을, 즉흥적 열광보다 지속적인 순종을 선택하라는 요청이다.

이렇게 보면 요한복음 21장의 방향성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과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실존적 나침반이다.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움직임이 곧 사명은 아니다. 열심이 곧 순종은 아니다. 방향이 틀어지면 성실함은 헛수고가 되고, 방향이 맞춰지면 작은 순종이 거대한 열매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가 요한복음 21장 해석에서 반복해서 요청하는 질문도 결국 이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의 말씀에 따라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뚜렷해질수록, 신앙은 불안한 자기증명에서 벗어나 주님을 신뢰하는 평안으로 이동한다. 또한 이 질문은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교회 전체의 정체성을 가른다. 교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무엇을 중심 가치로 삼으며, 어떤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는지가 곧 '그물의 방향'이 된다.

여기서 N. T. Wright가 강조한 부활 신학의 관점은 요한복음 21장의 메시지를 한층 확장한다. Wright는 부활을 '죽어서 다른 세계로 도피하는 표'로 축소하지 않고, 하나님이 새 창조를 이미 시작하셨다는 선언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부활은 미래의 위로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소명이다. 제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다시 사명으로 나아가게 되는 흐름은, 부활이 현실을 떠나게 하는 탈출로가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하는 동력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부활의 능력도 같은 결을 가진다. 부활은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종교적 안전지대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생명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는 추진력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오늘의 직장, 가정, 관계, 도시의 복잡함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물을 던질 것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오른편'은 결국 지리적 방향이 아니라 영적 기준이며, 그 기준은 자기중심적 계산에서 말씀 중심의 순종으로 이동하는 결단에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말씀의 지시가 주어지는 자리"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자기 경험을 총동원했지만, 방향을 가르쳐 주는 음성은 해변에서 들려온다.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만으로는 한계를 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음성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까지 삶을 확장시킨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성공의 비결'을 알려 주기보다 '경청의 자리'를 가르친다. 주님은 종종 우리가 익숙한 방식이 통하지 않는 순간에 말씀하신다. 그때 필요한 것은 자책이나 체념이 아니라, 방향을 다시 맞추는 회개의 지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회개는 눈물의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 선택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으로 이어진다.

'오른편에 던지라'는 명령은 오늘의 삶에서도 여러 형태로 번역된다. 어떤 이에게는 관계의 방식이 바뀌는 순종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일의 우선순위가 재배치되는 순종일 수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사역의 목표가 숫자와 인정에서 돌봄과 양육으로 이동하는 순종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을 "일의 양"으로 측정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말씀에 얼마나 정렬되어 있는가"로 점검하라고 말한다. 말씀 중심의 정렬은 즉흥적 결단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성경을 단지 지식으로 소비하지 않고 삶의 기준으로 삼는 습관, 기도에서 요구만 쏟아내지 않고 침묵 가운데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태도, 공동체의 조언을 통해 자신의 편향을 교정하는 겸손이 바로 그 훈련이다. 그 훈련이 쌓일수록 우리는 밤의 피로 속에서도 새벽의 음성을 더 빨리 알아듣게 된다.

또한 요한복음 21장의 기적은 교회의 '선교'가 무엇인지도 새롭게 정의한다. 그물의 풍성함은 단지 교회의 외적 확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물은 사람을 붙들어 두기 위한 포획의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관계의 구조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교회가 세상과 경쟁하듯 사람을 끌어모으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고 돌보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은 전도의 열정이 양육의 책임과 결합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즉 교회는 초대에 능숙해야 할 뿐 아니라, 동행에 능숙해야 한다. 처음 온 사람을 환대하는 식탁과, 오래 걷는 사람을 지탱하는 말씀의 양식이 함께 있을 때 교회는 '찢어지지 않는 그물'의 형태를 갖춘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요한복음 21장에서 읽어 내는 교회의 사명, 곧 부활의 능력으로 유지되는 공동체의 질서다.

요한복음 21장은 더 나아가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이 어떤 질감으로 나타나는지 묻는다. 부활의 능력은 세상을 압도하는 쇼의 힘이 아니라, 작은 순종이 반복될 때 축적되는 생명의 힘이다. 숯불가에서 조반을 나누는 장면은 그 힘이 얼마나 따뜻하고 인격적인지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부활을 말하면서도 사람을 차갑게 대한다면, 그것은 부활의 능력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은 인간을 도구로 만드는 죽음의 논리와 정반대의 길을 열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고 다시 일으키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을 묵상하는 성도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더 거칠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더 온유하게 하면서도 더 담대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응축한 예술적 표상으로 라파엘로가 그린 "기적의 고기잡이(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를 떠올릴 수 있다. 화면 속에서 제자들의 몸짓과 시선은 한 방향으로 끌려가며, 그 방향은 풍성한 물고기보다도 그 기적을 명령하신 주님을 향한다. 바다의 요동과 배의 불안정, 제자들의 당황과 경외가 한 장면에 엮이면서, 관람자는 "방향이 바뀌는 순간"의 전율을 읽게 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신앙의 방향성은 바로 이런 시선의 재배치다. 삶의 무게가 어디로 기울어 있는지, 공동체가 무엇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지가 결국 그물의 방향을 결정한다. 라파엘로의 장면은 풍성함이 주님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 오히려 풍성함이 주님을 향한 경외로 우리를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킨다. 신앙은 결과를 소비하는 종교가 아니라, 결과를 통해 주님을 더 분명히 알아보는 관계의 길이다.

라파엘로의 작품을 묵상하듯 바라보면, 요한복음 21장 그물 가득 고기잡이 기적은 단지 '놀라운 장면'이 아니라 '시선의 훈련'임을 깨닫게 된다. 제자들의 손은 그물을 붙들고 있지만, 그들의 변화는 손보다 눈에서 먼저 시작된다.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소비하고, 결과를 빨리 확인하려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종종 주님보다 성과를 먼저 바라본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요한복음 21장 해석의 중심은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이 먼저이며, 그 고백이 있을 때 결과는 신앙의 근거가 아니라 감사의 열매가 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은 교회로 하여금 '보는 방식'을 회복하게 한다. 사람을 숫자로 보지 않고 한 영혼으로 보며, 사역을 과제로 보지 않고 사랑의 응답으로 보며, 고난을 실패로만 보지 않고 증언의 기회로 보는 눈이다. 부활의 능력은 결국 새로운 눈을 주는 능력이고, 그 눈은 공동체를 더 깊고 더 넓게 만든다.

오늘의 성도에게 요한복음 21장은 실패 이후의 길을 묻는다. 우리는 실패의 시간에 익숙한 방식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시도하라"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던지라"라고 말씀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실패의 시간에 더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영적 감각이라고 말한다. 그 감각은 말씀 묵상과 기도, 공동체 안에서의 경청, 그리고 작은 순종의 훈련을 통해 자라난다. 또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사역의 동기를 점검하게 한다. 사랑이 빠진 활동은 사람을 소진시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지만, 사랑에서 시작된 사역은 느려 보여도 결국 공동체를 살린다. 부활의 능력은 속도를 내는 에너지라기보다, 끝까지 사랑을 지키게 하는 지속력이다. 결국 요한복음 21장은 신앙의 방향성이 단지 개인의 내면 정비가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윤리를 재구성하는 힘임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21장은 부활의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는지 보여 준다. 그 능력은 초월적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고, 방향을 잃은 제자들에게 길을 주고, 실패한 사랑을 회복시키며, 공동체를 사명으로 재편한다. 장재형목사의 해석을 따라 이 장을 묵상하면, 교회와 성도는 두 가지를 함께 붙든다. 하나는 말씀을 기준으로 방향을 다시 잡는 영적 분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기준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실천이다. 부활 이후의 삶은 '다시 돌아가는 삶'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우리의 밤은 끝나고, 새벽은 이미 왔다. 해변에 서 계신 주님이 오늘도 묻는다. "고기가 있느냐."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물을 던지라."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가 될 때, 그물은 가득 차고도 찢어지지 않으며, 부활의 능력은 세상 속에서 생명의 언어로 번역된다. 장재형목사가 요한복음 21장에서 붙드는 결론은 분명하다. 방향을 주님께로 맞추는 순종이야말로, 부활의 능력을 오늘의 삶으로 끌어오는 통로다.

장재형목사의 요한복음 21장 설교가 특별히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부활을 '먼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번역해 주기 때문이다. 그 설교는 우리를 자기 연민의 바다에 머물게 하지 않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해변으로 다시 이끈다. 그리고 그 해변에서 우리는 늘 같은 질문을 듣는다. 사랑이 있는가, 돌봄이 있는가,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방향이 선명한가. 이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자리에서 교회는 다시 시작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부활의 능력은 오늘의 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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