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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체포의 의미 - 장재형목사

1. 겟세마네의 의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체포되시는 사건(요한복음 18장 1-11절)은 신약성경 내내 반복해서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지고 속죄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신 자리이며, 동시에 제자들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뜻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순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본문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한꺼번에 우리의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가 주님을 배반하는 비극, 죽음의 권세가 무구한 메시야를 에워싸고자 하는 살기등등한 태도, 그리고 그 앞에서도 한 치 흔들림 없이 담대하신 예수님의 태도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 '패배'가 아니라 철저한 '순종과 승리'의 길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겟세마네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조금은 다른 분위기로 그려진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른바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자세히 다루어지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겟세마네 기도가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대신 요한은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길게 기록하고, 18장에 들어서는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곧이어 일어나는 체포 장면에 집중한다. 이는 요한이 이미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십자가의 길로 가실 것을 결정하셨고, 그 후의 모든 행보는 그 결심의 연장선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미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결단이 분명해졌으므로,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에서의 고뇌의 기도가 상세히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은 그 대신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라는 말을 통해,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음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장재형 목사"라는 키워드를 통해 이 본문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서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두고, 그 구속 사역의 과정 안에서 인간이 맞닥뜨려야 하는 죄성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강조한다. 겟세마네 사건은 이러한 장재형 목사의 관점에서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야말로 인간이 죄로 인해 어떤 비극적 결말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결코 흐트러짐 없이 완수되는 현장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사건은 '장재형 목사'가 수차례 설교에서 강조해왔듯, 기도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고뇌의 기도를 올리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하는 긴박감을 느낄 수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기도의 장면이 사라진 대신,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내가 그니라"라고 선포하시는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이는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순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신학적 포인트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고통을 느끼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획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시는 존재로 나타난다. 장재형 목사가 자신의 저서나 설교에서 반복해 왔듯이, "주님은 인간의 모든 죄성을 친히 지시고 가시되, 결코 죄에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길을 여셨다"는 관점은 겟세마네 체포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요한복음 18장 3절에서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의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찾으러 오는 장면에서, 요한은 세부적인 묘사를 통해 두 가지 요소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등과 횃불은 본래 어둠을 밝히는 것이요 진리를 찾는 상징물일 텐데, 이제는 거꾸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둘째, 무기는 예수님을 협박하고 위협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지만, 사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지키기 위해 쓰여야 했을 도구들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가리켜, "인간의 죄성이 가장 추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능력이나 자원은 사실 선을 행하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마땅하지만, 거꾸로 자신들의 이익이나 권력을 지키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00년 전의 사건일 뿐 아니라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늘 경종을 울리는 예화(例話)로서 의미가 크다.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베드로가 칼을 들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리는 장면이다(요 18:10). 인간적 용기가 극도로 발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그 칼을 칼집에 꽂으라 명하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 나아가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정의롭게 보이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뜻과 어긋난다면 결국은 잘못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인간적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충돌할 때,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을 붙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성도들이 자신의 의(義)나 열심을 자랑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것을 강조한다. 결국 우리의 열심은 인간적인 용기로 귀결될 수 있지만, 참된 순종은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걷는 믿음의 결단이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 따르면, 겟세마네 사건은 지금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두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전한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고난을 수용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인류를 자유케 하시는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잡히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나아가신' 것이라는 인식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라고 분명히 기록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계획 아래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사실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어떤 희생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새기게 된다고 역설한다. 둘째, 인간적인 열정이나 힘(칼, 횃불, 등)으로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베드로의 칼 휘두름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찬받을 만해 보이지만, 결국 그 길은 주님의 길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 주님은 직접 죽음을 맛보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고, 그로 인해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새 생명을 얻는 길이 열렸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자주 강조하는 '십자가의 역설적 승리' 개념이다. 십자가는 겉보기에는 패배와 죽음의 상징이지만, 실제로는 부활과 생명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겟세마네 체포 사건의 신학적 의미는 두 가지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과 희생이며,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동원된 사람들의 죄성과 연약함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제자들은 자주 넘어지고 배반을 일삼는다. 이 대조적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은 철저히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확고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발견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에 덧붙여, "교회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그 길을 먼저 걷고 또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분의 길을 따를 때,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완성하신 구속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겟세마네 사건은 예수님의 능동적 순종과 인간의 죄성의 교차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현실화되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텍스트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라는 장소 자체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성전에서 말씀을 선포하셨고, 다시 동산(감람산 혹은 겟세마네)으로 건너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셨다. 성전과 동산이라는 두 공간은, 공적인 사역의 장과 개인적 교제·묵상의 장으로 대비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비를 놓고, "오늘날 교회도 공적 예배와 설교에서의 사역뿐 아니라, 각 성도가 고요히 주님과 교제하는 '영적 동산'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겟세마네는 바로 그 '영적 동산'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가깝게 기도하며 가르치시고, 동시에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마지막 결정적 순종을 다짐하신 곳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겟세마네는 '주님과의 밀도 높은 교제와 결단의 장소'를 의미한다. 겉으로는 세상이 요란해도, 그 동산 안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다시 부활의 소망으로 나아갈 힘이 주어진다.

결국, 요한복음 18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동산 체포 사건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걸어가신 속죄의 여정이 얼마나 능동적이고 분명한 선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본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생각 이상으로 강렬하며, 예수님은 고난의 길에서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으셨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한결같은 확신을 우리에게 불어넣는다. 또한,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한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하여 제자들을 먼저 자유롭게 하심으로써, 희생의 자리를 오직 자신이 감당하신다. 우리는 그럼으로써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한없는지를 알게 된다. 이처럼 겟세마네 사건은 고난 속에서도 드러나는 사랑, 그리고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교회가 시대를 넘어 계속 전해야 할 복음의 심장부이자, 신앙적 삶의 원동력이 된다.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말씀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고백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깊은 도전을 준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돕고자 하거나, 세상의 힘과 질서를 빌려 복음을 확장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힘이요 참된 길임을 가르치신다. 장재형 목사가 거듭 강조하듯, 크리스천의 힘은 '인간적인 칼'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의 보혈과 부활을 통해서 주어지는 생명의 능력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임재하는 성령의 힘이다.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겟세마네 사건이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나 서사의 한 장면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 삶과 공동체에 강력하게 울려 퍼지는 복음의 메시지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결론적으로, 겟세마네 체포 사건은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묵상의 길목이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 그리고 제자들의 부족함이 교차하는 극적인 장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목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비하는 서막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십자가를 지셨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즉, 이미 예수님은 그 고난의 잔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십자가의 발걸음을 내딛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걸어가신 길에 나도 동참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결단이 어렵고 때론 고통스럽지만, 결국에는 부활의 기쁨과 승리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핵심을 우리 삶에 선포하고, 또 실천하도록 격려하는 사역을 장재형 목사는 지속적으로 펼쳐 왔다. 그 사역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과 부활의 능력이 놓여 있으며, 겟세마네 사건은 그 대속적 사랑의 서막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살아 있는 본보기인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고난과 제자들의 반응

이제 겟세마네 사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요한복음 18장 1-11절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제자들의 반응 양상이 교차하며 펼쳐진다. 이 고난은 결코 우발적이거나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계획 안에서 치밀하게 준비된 '구속의 사건'이다. 예수님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감람산)으로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자신이 경험해야 할 수난을 이미 알고 계셨다(요 18: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 채, 멀찌감치 불안과 두려움 혹은 어설픈 열정을 드러낸다. 이 대비가 곧 겟세마네 사건이 지닌 영적 함의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구체적 배경에서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달한다. 첫째, 인간의 죄성과 반역은 매우 교묘하고 집요하다는 점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 개인의 배신이 아니라 사람 안에 도사린 죄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하며 이기적인가를 보여준다. 요한복음 18장 3절에서 유다는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다. "등과 횃불"은 본래 진리를 찾거나 어둠을 밝히는 상징이 될 수 있지만, 지금은 진리를 없애기 위해, 혹은 빛을 어둡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것이 죄가 만들어 내는 왜곡이며,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해설이다. 교회 내부에서도, 혹은 사회 안에서도, 진리를 명분 삼아 자기 이익을 도모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권력과 야합하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겟세마네 사건은 이 같은 죄악의 본질을 고발하는 거울이다.

두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의 반응에 담긴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하듯이 물리적 힘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셨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을 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태도는 지극히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요 18:10-11).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곧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두고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 진짜 승리를 가져온다"는 원리를 가르쳐 주는 대표적 장면이라고 설파한다. 만일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맞섰다면, 유대 당국이나 로마 권력과의 전면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분의 지상 사역은 일시적으로는 반향을 일으켰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 인류의 죄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라고 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셨다. 이는 죄의 대가를 완전히 치르기 위한 길이었고, 부활의 생명을 여는 구원의 문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결국 그것이 진짜 승리"라는 바울의 고백(고전 1:18 이하)과 정확히 부합한다고 풀이한다.

세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심으로써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믿는 이들을 보호하고 자유케 하신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8장 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라고 하셨다. 이는 곧 제자들을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시키려는 의지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에 대해 "주님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시고, 그들이 생명을 얻도록 보호하신다"는 복음의 진리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되어 심문받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제자들은 한동안 흩어져 숨어 지냈지만, 부활 후에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거듭난 사도들로 일어섰다. 이처럼 예수님의 희생이 다른 이들에게 자유와 회복의 길을 열어 주는 방식은, 오늘날 교회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핵심 가치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사회를 섬기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배우는 희생과 사랑이 실질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항상 겟세마네 사건의 장면을 예로 든다. 예수님이 희생을 택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결국 구원을 누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파송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메시지를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우선, 겟세마네에서 드러난 인간의 죄성과 반역의 양상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유다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고, 혹은 베드로처럼 열심이 앞선 나머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려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동기와 행위를 살피고, '나의 의(義)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삶'이 되도록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처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현대인에게도 똑같이 울려 퍼져야 한다. 그리고 이 기도의 배경에는 늘 '겟세마네 동산'이 상징하는 고요하고 밀도 있는 주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다음으로, 교회 공동체는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맞설 때, 힘의 논리나 과격한 방법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영적 무기를 사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 전파나 교회 성장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권세나 폭력적 수단을 빌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두고, "우리가 복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성공과 권력을 더 좇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가장 큰 능력은 '사랑으로 죄인까지도 품으시는 자기 비움'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또는 교권(敎權)을 내세워 성도들을 억압하는 식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낮아지는 섬김과 희생을 통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된 십자가의 길이 지금도 유효함을 증거해야 한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결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이나 시련을 단순히 '피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빚어 가시는 구속 역사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때로는 병이나 경제적 문제, 관계의 단절 등 다양한 어려움이 닥칠 수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 "이것이 내게 불필요한 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한 잔일 수도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피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지만, 그 잔을 끝내 순종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생명의 열매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연약함과 두려움은 오히려 현대 교회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결국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실패하고 도망쳤지만, 그들이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오셔서 회복시키셨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교회의 기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가리켜 "실패한 자들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른다. 교회가 겟세마네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배반하는지를 자각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 복음이 교회의 역사와 삶을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킨다. 우리가 그 사랑을 체험할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을 전하고, 용서와 회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겟세마네 체포 장면이 단지 예수님의 수난 서사의 한 단락이 아니라, 복음 전체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어둠과 빛, 배신과 헌신, 폭력과 희생,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구속, 이 모든 요소가 겹겹이 교차하면서 한 장면 안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보여 주는 결론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절정"이라는 메시지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예수님처럼 스스로 낮아지는 걸음,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 것을 포기하는 걸음에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여기에 겟세마네 사건이 현대 교회에 던지는 도전과 소망이 동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겟세마네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복음의 중심 진리다. 그 복음의 중심에는 무력과 강압이 아니라, 십자가의 자기 희생과 사랑이 놓여 있다. 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연약한 제자들도 회복되었고, 배반했던 자들도 돌이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동일한 사랑이 교회를 붙들고, 성도들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자로 세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교회는 겟세마네에서 배우고,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된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요한복음 18장 6절에 나오는 놀라운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I am he)"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군인들과 하속들이 땅에 엎드러진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권위가 순간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인간의 죄성과 폭력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체포되기를 허용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겟세마네에서 발견하는 '거룩한 역설'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폭력과 배신에 맞서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사실이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세상의 악에 맞설 때, 최종적으로 선택해야 할 무기가 '사랑과 희생'이라는 점을 이 사건이 압도적으로 보여준다고 설파한다.

겟세마네 사건을 가슴에 품고 사는 성도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고 담대하게 믿으며, 동시에 그분의 길이 어떤 길인지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감에 있어 필요한 것은 '인간적 힘'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순종'이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지속적으로 가르쳐 왔던 핵심 교훈이다. 교회가 겟세마네 사건을 매년 성주간이나 고난주간에만 상기할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 장면을 떠올리며,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 그리고 희생의 정신을 자신의 삶에 체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참된 제자가 되고,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장 목사는 거듭 강조한다.

겟세마네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십자가 사건으로 가는 결절점이자, 인간의 죄성 안에서도 계속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얼마나 확실하고 능동적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예수님이 그 길을 자발적으로 가셨고, 제자들은 비록 연약했으나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체포 장면을 통해, 자신들의 위치와 사명을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우리가 성도로서,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실제화하고 있는지 스스로 평가하는 잣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결국 교회가 세상에 제시해야 할 유일하고도 참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로 가는 길의 문턱이 바로 겟세마네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다시금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한다.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결단이 없었다면, 골고다의 구속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죄가 만들어 낸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 길을 끝까지 걸으심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이루셨다. 교회가 이 사실을 믿고 선포하며, 삶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겟세마네 사건의 궁극적 의미이자, 장재형 목사가 계속해서 강조해 온 복음 사역의 방향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길에 동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진정한 '등'과 '횃불'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칼(말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결코 우리 힘이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루시는 구속의 능력 안에서, 교회와 성도는 매일 새롭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18장 겟세마네 사건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우리는 '장재형 목사'가 거듭해서 말해 온 주제, 곧 "십자가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이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