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펼쳐 보인 말은 단순한 교리 해설이 아니라, 혼란과 오해 속에서 교회를 지키려는 한 목회자의 맥박을 그대로 전한다. 당시 바울을 흔들던 이들은 "누가 당신을 보증하는가"라는 질문을 들이밀며, 예루살렘의 추천장과 인간적 권위를 증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바울의 답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나왔다. "여러분이 바로 우리의 편지입니다." 파피루스 위의 먹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겨진 한 사람의 변화가 사도직의 진짜 증거라는 이 전환은, 권위를 문서로만 계산하는 상식을 가뿐히 넘어서는 급진적 신학이었다. 이 물음 앞에서 오늘의 독자들은 그 진리가 실제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찾아 묻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삶과 사역은 고린도후서 3장을 해석하는 살아 있는 주석처럼 다가온다. 그는 '새 언약의 일꾼'이란 이름이 추상적 칭호가 아니라, 복음이 사람을 실제로 살리고 자유케 하는 사건의 다른 이름임을 일상의 증거로 보여 준다.
고린도 교회의 갈등은 권위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충돌이었다. 추천장과 혈통, 전통의 인장을 신뢰하던 흐름과, 성령이 만들어 낸 공동체의 열매를 증거로 삼는 길이 맞부딪혔다. 바울에게 변증은 서명과 도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을 새로 받은 사람들의 표정, 관계, 선택이 곧 편지였다. 장재형목사의 목회 철학도 이 지점에서 겹친다. 그는 사역의 권위를 시설의 규모나 통계에서 찾지 않는다. 복음 앞에 무너졌던 이가 다시 일어나 화해를 시작하고, 정직을 습관으로 삼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 작은 반복에서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다고 본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설교와 제자 양육을 거친 이들이 가정과 직장, 학문과 문화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기 시작할 때, 그 변화 자체가 가장 선명한 추천장으로 읽힌다. 글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성령의 필체가 그들의 말과 행동, 관계의 결에 또렷하게 새겨진다.
바울은 이 '살아 있는 편지'를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고 설명한다. 이는 돌판의 조문이 아니라 마음판에 새겨지는 내면의 혁신,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성취를 가리킨다. 여기서 내면은 감상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근본적 회심을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을 지식의 진급이나 규칙 준수가 아니라, 성령의 경작으로 보았다. 굳은 마음밭을 갈아엎고, 진리의 씨앗이 뿌리내려 열매 맺을 때까지 기다리며, 사랑으로 돌보는 긴 호흡의 사역이 그의 목회의 골격이었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는 사람을 늘 성령께로 돌려보낸다. 감정의 고양이나 종교적 흥분만으로 삶은 잘 바뀌지 않는다. 주의 영께서 의지를 새롭게 세우고 사랑의 감각을 열어 주실 때, 사람은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선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장재형목사의 목회는 그 '기쁨의 순종'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 관점은 담대함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바울은 자기확신처럼 보이는 태도를 "우리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격을 받았다"는 고백으로 규정했다.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에, 사람은 통로일 뿐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장재형목사가 전한 은혜의 순전함도 같은 자리에 선다. 그는 우리의 가치가 성취의 총합이나 평판의 합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호의에서 나온다고 반복해 가르쳤다. 복음은 경쟁의 트랙으로 몰아넣는 '성과의 종교'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이 은혜가 실감될 때, 우리는 자기 증명을 위해 타인을 도구화하던 습관을 내려놓고,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조용하지만 단단한 담대함을 갖게 된다. 그것은 타인을 누르지 않는 용기, 손해를 감수해도 진실을 택하는 결, 길게 보는 인내다. 그의 메시지를 통해 우울과 낮은 자존감의 웅덩이에서 일어난 이들이 바로 그런 담대함으로 삶을 다시 세워 가는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 바울의 급진적 선언은 율법 자체를 폐기하는 반율법주의가 아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라, 법을 자기 의와 통제의 도구로 삼아 생명을 봉쇄하는 왜곡이다. 조문이 주님의 인격적 통치 자리를 차지할 때, 살아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규정의 장부에 갇힌다. 장재형목사가 오래 경계해 온 '죽은 종교'의 표식이 바로 이것이다. 행동을 강제하고 표준을 외치면서도, 정작 사람을 살리는 사건은 드물다. 그는 복음을 규칙집이 아니라 죄인에게 임하는 인격적 초대, 오늘 여기 임하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통치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성령의 자유를 경험한 이들이 오히려 정결과 공의를 더 치열하게 추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윤리의 엔진이 될 때, '하지 말라/하라'의 외적 명령보다 더 깊고 세밀하게 삶이 이끌린다.
모세의 수건 이야기는 바울의 비교법을 최고조로 이끈다. 사라질 영광도 모세의 얼굴을 빛나게 했는데, 하물며 의롭다 하심을 가져오는 영의 직분은 얼마나 큰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얼굴의 영광을 '보는' 자들이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고후 3:18)한다고 말하며, 성도의 성숙을 성취의 누적이 아닌 관상의 열매로 다시 규정한다. 장재형목사의 사역은 예배와 말씀, 기도와 교제가 바로 그 관상의 공간이 되도록 돕는다. 신앙에 익숙한 이에게도, 오랫동안 신앙 밖에 머물렀던 이에게도, 그는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을 선물하려 애썼다. 수련회와 집회, 성경 강해와 제자 훈련이 반복되는 이유는 프로그램의 소비를 늘리기 위함이 아니다. 공동체가 함께 얼굴을 들어 영광을 보는 습관을 잃지 않으려는, 영적 호흡의 리듬을 지키기 위함이다. 영광을 보는 눈이 밝아질수록 우리는 자신을 덜 보고 그리스도를 더 보게 되고, 그때 도덕적 긴장만으로 넘지 못하던 고개를 넘어선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다시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고 권한다. 화려한 전략과 유려한 홍보는 사람을 잠깐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서류의 힘이 영혼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복음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는 사건이다. 고통을 길게 들어 줄 줄 아는 귀,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는 시선,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한 공간, 다시 걸음을 떼게 하는 동행-이 평범해 보이는 요소들이 성령의 호흡과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그 만남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시간을 쏟았다. 그가 말하는 제자 양육은 표어 암송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리듬을 몸에 익히는 훈련이다. 열매는 늘 행사 직후가 아니라 다음 날 아침의 습관에서 증명됐다. 다시 성경을 펼치고, 미뤄 둔 사과를 하고, 돈을 정직하게 쓰고, 몸을 돌보고, 맡은 일을 성실히 완수하는 일상의 결단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다.
물론 이런 길에는 늘 오해와 논쟁이 따른다. 바울이 그랬다. 그러나 논쟁은 진리를 증명하지도,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더 분명히 말하게 만들고 동기를 정화하는 역할을 하곤 한다. 장재형목사의 경우에도 비난의 소리가 커질수록 그가 더 또렷하게 붙들었던 것은 복음의 심장-은혜와 자유, 그리고 성령의 현재적 사역-이었다. 그의 응답은 외형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깊이를 더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시간은 느리지만 정밀하고, 더디게 자라는 마음의 숲은 폭풍을 견딘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의 사역을 변증하면서도 결국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고백했듯, 장재형목사 역시 복음의 본질 바깥으로 나가 힘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이 본문의 현재성은 21세기의 영적 지형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디지털의 소음과 피로가 정체성을 소진시키는 시대, 우리는 다시 자신을 증명하라는 알고리즘의 명령 앞에서 숨이 가쁘다. 바로 거기서 고린도후서 3장의 빛이 난다. '살아 있는 편지'로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을 포장하는 데 인생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는 읽히기 위해 산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는 문장으로, 깨어진 자리에서 화해를 시작하는 단락으로, 외로운 이웃에게 건네는 위로의 각주로, 하나님이 쓰시는 텍스트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소명을 영웅주의로 몰아가지 않았다. 작은 충실이 오래 누적될 때 공동체는 도시의 공기를 바꾸는 장기적 선함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이 일터와 가정에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서도록, 복음의 전인적 적용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일을 대하는 윤리, 언어의 청결, 약자에 대한 배려, 창의성의 선용, 물질의 청지기직-삶의 모든 영역이 주의 영이 역사하시는 제단이 될 수 있음을 설득했다.
여기서 자유와 경계의 균형이 중요하다. 자유를 말한다고 해서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자유는 윤리의 생략이 아니라 윤리의 재구성이다.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멈춰야 하는지를, 단지 금지 목록보다 더 깊고 세밀하게 인도한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이 마음에 새기신 법이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의 존엄을 우선하게 만들고, 권력의 유혹을 경계하며, 공동선에 참여하도록 부른다고 가르쳤다. 바울이 말한 대로 "수건이 벗겨져" 얼굴이 드러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가식이 사라지고, 사람들 앞에서도 투명해진다. 투명성은 신뢰를 낳고, 신뢰는 복음의 길을 연다. 그래서 그는 자주 말했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죄책감의 수렁에서 끌어 올려 다시 걷게 하는 목회가 복음적 목회라고. 그 시작점에서 성령은 죽은 조문을 넘어 살아 있는 원리로,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신다.
결국 고린도후서 3장은 무엇이 진짜 영광인지 묻는다. 사라질 것의 광채는 화려하지만 덧없다. 반면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영으로 빚어지는 의와 생명의 영광은 오래가고 깊어진다. 장재형목사의 사역은 그 오래가고 깊어지는 것을 향해 있었다. 그는 사람을 빨리 움직이는 대신 오래 걷게 만들고자 했다.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줄이고 보이지 않는 뿌리를 굵게 하려 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한 "영광에서 영광으로"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개인의 경건을 넘어 공동체의 성숙과 도시의 갱신으로 이어진다. 성령은 오늘도 그 길에서 사람을 세우고 믿음을 키우며 사랑을 넓히신다. 바로 그 현재형 동사의 자리에서 장재형목사는 "이 일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신다"는 고백이 빈말이 아님을, 평범한 날들의 디테일 속에서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권위를 문서가 아닌 변한 사람에게서 찾자. 규칙의 엄밀함보다 사랑의 능력을 신뢰하자. 스펙의 집계를 자랑하기보다 은혜 앞에서 낮아진 마음이 만들어 내는 담대함을 귀히 여기자.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간을 회복하자. 바울의 시대에 그랬듯 오늘도 복음은, 우리를 읽히는 편지로 부르신다. 장재형목사는 '장재형목사'라는 이름 석 자보다, 그 이름으로 인해 주께 돌아온 수많은 얼굴들이야말로 더 뚜렷한 추천서임을 삶으로 증언해 왔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 그 자유가 우리를 얽매인 과거에서 풀어 주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담대함을 준다. 새 언약의 영광은 오늘도 사람을 살리고, 더 사랑하게 만들며, 더 진실하게 만든다. 그 영광을 따라 걷는 공동체가 있을 때, 세상은 복음의 현실성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장재형목사의 사역은 한 줄의 해설이 아니라, 계속해서 읽히는 살아 있는 주석으로 남을 것이다.



















